[문화칼럼] '느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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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영 문학평론가·동아대 교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롤러코스터를 닮았다. 그 롤러코스터는 양쪽에 속도와 효율이라는 이름의 바퀴를 달고서 쾌속질주를 무한반복한다. 그 속도에 어지러움을 느낀 사람들이 '느림'에 대해 사유하고 느리게 살아갈 것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느림'에 관한 사유가 미친 듯이 내닫는 롤러코스터의 완급을 과연 조절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한 장면은, 종종 나를 '느림'에 관한 성찰의 심연으로 이끈다. 그것은 내게 '느림'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도록 만드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노교수의 수영동작이 준 일깨움

대학 1학년 때의 일이니 30년도 더 된 얘기다. 부산에서 자란 덕분에 헤엄칠 줄은 알았지만, 호흡 요령을 익히지 못한 내 영법(泳法)은 머리를 쳐들고 하는 '촌놈스타일'이었다. 그런 영법은 시골 냇가나 바다에서는 몰라도 실내수영장에서는 도무지 폼이 나질 않았다. 수영선수들처럼 나도 머리를 물속에 잠근 채 재빠르게 헤엄쳐 나가고 싶었다. 교양 체육 시간에 호흡하는 법을 배우고 틈틈이 학교 수영장에서 연습을 했다. 그러던 어느 평일 오전의 수영장에서였다. 이른 시간이라 수영장에는 나 혼자였다. 어렵사리 호흡법을 터득한 나는 이제 어떻게든 좀 더 멋있는 포즈로 좀 더 빨리 헤엄치고 싶어졌다. 힘든 줄도 모르고 25m 레인을 왕복하기 여러 차례, 마침내 기진맥진하여 물 밖으로 나와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입구 쪽에서 머리 희끗희끗한 노인 한 분이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내게 '기독교 개론'을 강의했던 신학과 교수였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는 노교수였다. 약간 마른 체형의 노교수는 가볍게 몸을 풀더니 물속에 천천히 몸을 담그고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수영을 한다기보다, 몸을 물에 담근 채 최대한 느린 속도로 그냥 팔을 천천히 젓기만 했다. 답답할 정도의 느린 속도였다. 마치 영화나 텔레비전에서의 느린 재현화면을 보는 것 같았다. 수영하면서 팔다리를 저을 때 일어나는 물보라도 거의 없었다. 고여 있는 물이 분명한데도, 그는 마치 천천히 흐르는 강물의 유속에 몸을 맡긴 채 둥둥 떠내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한없이 느린 영법이 일으킨 착시였다. 그는 그렇게 조금도 쉬지 않고 수영장을 대여섯 차례 왕복했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더 멋지게 헤엄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내게, 노교수의 영법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아, 저렇게도 수영할 수 있구나. 저렇게 느린 속도로, 물의 저항을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물의 부력에 몸을 맡긴 채 물과 하나가 되듯이 헤엄칠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

나는 다시 물에 들어가 노교수의 수영동작을 흉내 내 보았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냥 물에 떠 있는 건 쉽지만, 마치 물결 따라 흘러가듯 천천히 헤엄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그때 비로소, '물을 즐기는 수영'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무조건 빠르고 멋지게 헤엄치고 싶어 팔다리를 최대한 크고 빨리 휘젓는 것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수영선수들의 빠르고 힘찬 영법보다, 노교수 쪽이 더 멋져 보였다. 문득 그런 깨달음이 왔다. 수영선수들은 수영 자체를 정말로 즐기며 수영하는 걸까. 그들은 수영을 즐기는 게 아니라, 수영시합에서의 '승리'를 즐기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수영장에서 살다시피 하지만, 그건 '즐기는 수영'이 아니라, 0.001초를 단축하기 위한 피말리는 고된 훈련을 위해서다. 수영 선수가 된다는 건, 어쩌면 물에서 헤엄치고 노는 '즐거움'과 결별해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느려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수영을 삶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모두 선수처럼 속도와 효율의 영법으로 움직이려고 용쓰고 있는 셈이다. 빠르게 헤엄치는 것이 지상선(至上善)인 한, 물의 온도와 감촉, 물이 내 몸을 밀어올리는 부력의 느낌, 물에 떠 유영할 때 내 감각에 되살아나는 자궁 속에서의 기억(태아는 양수 속에서 유영한다!)들을 즐기기는 어렵다.

'느림'에 의해서만 감지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올라타 있는 이 롤러코스터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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