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뉴스] 항공모함 이야기 10 / 세상에 없던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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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항공모함 대결 '불타는 산호해'

불타는 쇼호. 미군뇌격기의 어뢰투하가 오른쪽에 보인다.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기습공격 이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아시아와 태평양 전역을 휩쓸었다. 4달 만에 대만, 홍콩, 싱가포르, 인도차이나 등 남태평양에 이어진 유럽제국 지배 식민지들이 일본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다음의 목표는 호주 침공의 발판이 되는 파푸아뉴기니 점령이었다. 전략적으로 파푸아뉴기니를 거점 삼아서 일본 중형 폭격기의 전진 기지로 이용하면서 남방전선을 공고히 할 심산이었다. 먼저 파푸아 뉴기니의 수도 포트 모르즈비(Port Moresby)를 함락시킨 뒤, 길버트 제도의 남서쪽의 나우루 섬과 오션 섬을 함락 한다는 것이 작전의 핵심. 일본인들은 모르즈비의 M과 오션의 O를 합쳐서 ‘MO 작전’으로 불렀다. 

호주를 위협할 수 있는 전략 거점인 포트 모르즈비 점령을 위해 일본은 다카기 다케오 중장이 지휘하는 2만6천 톤급 항모 쇼카쿠와 즈이카쿠로 이루어진 강습부대와 7천500톤급의 경항모 쇼호로 이루어진 기동부대를 투입시켰다. 이에 맞서는 미국은 플레처 제독의 지휘하의 2만2천톤급 요크타운과 3만3천톤급 렉싱턴으로 짜여진 제17기동부대를 발진한다. 한판 승부의 무대는 서남 태평양, 호주 북동 해안에 접하는 바다이다. 서쪽은 뉴기니 남단에서부터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을 따라 남위 30도의 엘리자베스 초(礁)까지, 동쪽은 비스마르크 제도, 솔로몬 제도, 뉴헤브리디스 군도, 뉴칼레도니아 섬을 잇는 선까지로 된 이름도 아름다운 산호해였다.

산호해에서 미군과 일본군이 맞붙은 산호해전은 과거 군함끼리 교전을 하던 전통적인 해전 범주를 벗어나 항공모함끼리의 맞붙은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 해전으로 기록, 인류의 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일본의 항공모함들
● 미·일 항공모함의 한판 승부

일본은 개전 초 기습공격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승기는 여기까지였다. 미군측은 비밀 보호를 위하여 특정인만 이용할 수 있도록 변형시킨 일본군의 암호체계를 읽고 해독하면서 절치부심 진주만 설욕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직이라는 암호해독기 앞에 일본의 암호체계 JN-25는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일본군은 이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일본의 기습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미군의 작전은 첨단 레이더 기술이 더해져 일본군의 수를  미리 읽고 한수 앞설 수 있었다.

5월 3일 일본군은 수상기지 건설을 위해서 요충으로 찍어둔 툴라기 섬에 기습적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호주군이 방어 중이었으나 순식간에 일본군은 섬을 장악했다. 그러나 일본 함대의 움직임을 추적하던 미군은 그 이튿날인 5월 4일 아침 요크타운에서 출격한 함상기로 툴라기 섬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군 구축함과 수송선 3척을 공격, 침몰시킨다. 미해군 항공기의 툴라기 섬 공습을 전해들은 일본군 역시 함재기를 급하게 발진시켰지만 요크타운과 거리가 멀어서 찾지 못함으로써 요크타운은 화를 피할 수 있었다.


● 수 읽힌 일본, 첫 항공모함을 잃다 

한편 5월 5일 날이 밝자 요크타운을 주축으로 한 제17해군 기동부대는 포트 모르즈비 상륙을 위해 접근하는 일본군 주력을 치기 위해서 산호해에 조용히 진입하면서 일본군 함대를 찾기 시작한다.

이틀 뒤인 5월 7일 08:45 미군이 띄운 정찰기가 미시마 섬 근해에서 지원부대와 함께 서진하는 항모 쇼호를 포함한 일본군 수송 선단을 발견했다. 곧바로 160마일 남쪽에 위치했던 플레처 제독은 렉싱턴에서 급강하 폭격기 돈틀리스와 요크타운의 뇌격기를 발진시켜 시켜서 일본군의 선봉에 대한 공격에 들어갔다. 항공모함 쇼호가 주목표였다.

11시 경 아울트 중령이 이끄는 함재기들이 급강하면서 공격을 감행한다. 이에 맞서 쇼호에서 날아오른 제로기 9기가 방어에 나섰다. 처음 선두에 나선 3기의 급강하 공격기가 제로기들과 대공포에 격추된다. 그러나 이어서 돈틀레스의 폭탄 2발이 쇼호의 갑판을 뚫는다. 갑판이 강타 되었지만 쇼호는 여전히 회피 기동을 하는 등 작전 능력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11:30 경 요크타운에서 날아온 뇌격기들이 필사적인 방어를 뚫고 어뢰들 발사한다. 흰 궤적을 그리면서 쏜살같이 다가간 어뢰들은 쇼호의 옆구리에 명중되었고 큰 폭발이 일어났다. 이윽고 폭탄 11발, 어뢰 7발을 맞고는 화염에 휩싸였고 함수부터 급격하게 가라앉아 11:50에 침몰됐다. 렉싱턴의 비행대장 딕슨이 “적 항모 침몰 확인” 무전을 날렸고 이는 미군이 건진 첫 일본 항공모함 격침 전과였다. 1라운드의 환호성은 미군이 올리게 된다.

쇼호는 처음에는 보급선이나 지원함으로 만들어졌으나 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다. 처음부터 항공모함으로의 개조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으며 대부분의 주요구조물이 다시 만들어 졌고 비행갑판과 격납고가 만들어졌다.  격납고는 기존의 수상기들을 싣던 격납고를 확장했으며 2차대전 중에 수십개의 대공포들이 추가되었고 비행갑판도 앞으로 확장되었다. 비행갑판 위에 아일랜드는 없었다. 쇼호는 개조 되자마자 나섰던 전장에서 페인트 냄새도 가시지 않은 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이다.

같은 날 오후 일본군 함재기들은 복수를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미항모를 찾아 나섰으나 스콜로 기상이 악화되면서 미 항모들은 일본군의 공격을 모면하게 되었고, 발진한 일본군 함재기들은 미군전투기와 교전하다가 일몰을 맞는다. 회항하던 일본기들은 어둠 속에서 요크타운을 자기네 항공모함으로 알고 착륙하려다가 놀라서 다시금 기수를 올려 도망을 쳤고 상당수 비행기가 기름 부족으로 바다에 추락하면서 큰 손실을 본다. 요크타운 승무원들도 저공으로 접근하는 항공기를 보고 유도등을 켰다가 날개의 빨간색 원을 보고 깜짝 놀라서 황급하게 대공포를 발사하는 어이없는 소동이 벌어졌다. 밤이 되자 양측의 기동부대는 서로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다음날의 결전을 준비했다.

● 산호해 해전의 날이 밝다 

이윽고 다음날 5월 8일 아침이 밝자 마자 미군과 일본군은 거의 동시에 서로의 함대를 찾기 위해 정찰기를 띄웠다. 상대편 항모의 위치를 발견했다는 전문을 접한 미군과 일본 측 항모에선 함재기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요크타운에서 발진한 30대의 미군 공격기들은 쇼카쿠와 즈이카쿠에 대한 공격을 시도한다. 그러나 뇌격기들이 어뢰 공격을 위한 침로를 잡는 동안에 쇼카쿠에서 제로기들이 발진할 시간을 벌어주게 되었다.

한편 속력이 느린 미군 뇌격기들은 최고의 속도를 자랑하던 제로기들을 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미군 뇌격기들이 격추되면서도 발사한 어뢰 5발은 모두 빗나갔다. 그러나 다행히도 급강하 폭격기가 갑판에 폭탄 3발을 명중시킬 수 있었다. 이마저도 1발은 불발탄. 곧 바로 화재가 발생했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불은 진화된다. 그렇지만 갑판에 손상을 입은 쇼카쿠는 함재기 운용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쇼카쿠는 황급히 트루크로 회항을 한다. 이때 또 다른 항모 즈이카쿠는 스콜 속으로 숨어 미군의 급강하 폭격기와 뇌격기의 공격을 모면할 수 있었다.

뒤이어 렉싱턴에서 날아오른 공격기들은 일본함대에 도달하기도 전에 고공에 자리를 잡은 일본기들의 매복공격을 받는다. 구름 속에 숨어 있던 제로기들은 일제히 기수를 아래로 돌려서 아래쪽 미군기들을 공격해왔다. 53대의 미군기 가운데 절반 가량인 22기가 격추된다. 미군의 일 항모공격은 크게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후퇴하고 만다.


● 비운의 렉싱턴, 요크타운은 구사일생

구사일생 진주만에 돌아온 요크타운

한편 레이더로 일본기들의 접근을 미리 탐지한 미 항모에선 와일드 캣 편대를 발진 시켰으나 고작 15기에 불과 했다. 이에 비해 일본기들은 69기였다. 숫적 우세와 우수한 제로 전투기와 조종사들을 앞세워 하늘의 사무라이들은 요크타운과 렉싱턴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맑게 개인 날씨도 일본 공격기들을 돕는 듯 했다.

먼저 뇌격기의 공격을 받은 요크타운은 어뢰들은 피할 수 있었으나 99식 급강하 폭격기의 공격엔 어쩔 수 없었다. 폭탄 1발이 갑판에 떨어지면서 승조원 66명이 사망하고 선체엔 큰 구멍이 났다. 필사적인 화재 진압 덕에 더 이상 피해는 나지 않았지만 전투는 불가능했다.

이에 비해 렉싱턴은 운이 없었다. 일본군 뇌격기에 의한 공격으로 어뢰 2발을 맞은 렉싱턴은 갑판 아래에서부터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조함능력을 상실한다. 이어진 급강하 폭격기의 공습으로 2발의 폭탄을 더 맞는다. 일본기의 공격은 모두 좌현에 집중되었고 3만3천 톤의 거구 렉싱턴은 좌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2시간여 필사적인 복구노력으로 기능을 회복하려던  렉싱턴 선체 내에 있던 연료에 불이 붙으면서 큰 폭발이 일어났고 렉싱턴의 함장 프레드릭 C. 셔먼 대령은 이날 오후 5시 7분 “함을 포기한다”는 퇴함명령을 내렸다. 동료인 구축함 펄스호가 발사하는 어뢰 4발에 인해 렉싱턴은 반으로 갈라져 침몰하는 운명을 맞았다. 미군측으로서도 태평양전쟁 첫 항모 손실로 기록되었다.

순양전함 기공 되다가 폐기될 운명에서 기사회생, 1925년 진수, 미국항모로 두 번째 순번인 CV-2로 명명된 렉싱턴. 기준 배수량이 3만3천 톤이었지만, 실제 만수 배수량은 4만 톤으로 대전 당시 미국항모세력의 중추였다. 함재기를 91대를 실을 수 있었고 2대의 승강기로 함재기의 이 착함을 도왔다. 원래가 순양전함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항공모함이라고 해도 34.25노트를 낼 정도로 항속이 빠르고 큰 비행기 탑재 능력을 갖춰 ‘회색 귀부인 그레이 레이디 Gray Lady’ 또는 ‘레이디 렉스Lady Lex’로 불린 렉싱턴. 그녀는 17세 꽃다운 나이로 산호해에서 영면에 들어갔고 2차대전 미군 항공모함의 첫 격침으로 기록된다. 

렉싱턴호의 갑판에서 발진준비 중인 F4F와일드캣

탈출하는 렉싱턴 수병들


● 전술에선 졌지만 전략에서 이긴 미군

산호해 해전 미·일 전력
                            

한편 이보다 휠씬 앞서 4월 25일, 둘리틀 특공대 작전을 무사히 마친 제16기동부대 항모 호넷과 엔터프라이즈가 진주만에 입항했다. 5일간의 정비를 마치곤 쉴틈도 없이 포트 모르즈비 공략에 맞서고 있는 제 17기동대 요크타운과 렉싱턴 지원을 위해 출항한다. 진주만과 산호해 사이의 5,600km 거리. 최대한 속력을 내었지만 이들이 전투 해역에 도달하기 하루 전인 5월 8일에 산호해 해전은 끝나버린다.

일본항모전단은 항모 쇼호를 잃고 쇼카쿠가 큰 피해를 보았고 즈이카쿠는 함재기 운용은 가능했지만 대부분의 함재기들이 손상으로 출격 곤란한 상태였다. 이런 빈약한 공중 엄호를 가지고는 포트 모르즈비 공략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새로 나타난 미군의 항모 전단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판단 한다. 마침내 일본군은 포트 모르즈비를 포기하고 라바울로 회항한다.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은 경량급 항모 쇼호를, 미국은 중형급인 렉싱턴을 잃었다. 일본은 쇼카쿠가 미국은 요크타운이 대파되었고 일본은 항공기 80대를 미군측은 66대의 항공기를 상실했다. 전문가들은 “전술적인 면에서는 미국의 중형항모를 침몰시킨 일본해군의 판정승처럼 보이지만 일본해군은 뒤 이은 미 제16기동함대의 견제 등으로 포트 모르즈비 점령을 포기하고 철수함으로써 사실상 전략적인 면에서는 연합군 측의 승리였다”고 판단한다. 일본은 개전 이래 처음으로 연합군에 의해 진격이 저지되는 쓴맛을 맛보기 시작했고 이 전투는 이후 연합군의 반격을 예고하는 한편의 전주곡이었다. 

상대방을 전혀 보지 못한 상태에서 항공기만으로 벌인 해전에서 항공모함이 주요 표적이 된 해전을 통해 일본 해군 사령관 야마모토는 산호해 해전 태평양에서 더 이상 미군항모를 그냥 놔두어선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한다. 다름 아닌 미드웨이 침공이다. 산호해 해전은 항공모함이 태평양 전쟁의 전세를 뒤집는 핵심으로 부상한 미드웨이 해전의 전주곡이었다. 

SEA& 강승철기자ds5bsn@busan.com

폭발하는 렉싱턴

 
1930년대 렉싱턴

TIP / 돈틀레스 급강하 폭격기

돈틀레스 급강하 폭격기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에 슈투카, 일본에 99식 급강하 폭격기가 있었다면 미국엔 돈틀레스 급강하 폭격기가 있었다. 더글라스사에서 개발, 항공모함 함재기로 운용된 이 겁모르는(dauntless)는 녀석은 태생적으로 폭격기지만 조종성능도 좋아서 산호해 해전에서는 한 미군 조종사가 제로기 3대와 동시에 싸워서 2기를 전방기총으로 격추시킨 뒤 1기와 날개 끝을 부딪혀 날개를 잘라버리고 무사 귀환한 사례까지 있을 정도. 미해군 운용 함재기들 중에서 손실률이 가장 낮았다. 조종사들은 튼튼한 이 녀석의 기체를 사랑했다.

1939년 최초 양산형인 SBD-1에서 시작, 12,00 마력의 R-1820-60 엔진을 장착하고 방어 기총을 강화한 SBD-5가 총 2,400기 이상이 생산되어 전체 SBD의 절반정도를 차지했다. 이후에는 최종 생산형인 SBD-6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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