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최서해 소설과 묻지마 범죄
/한수영 동아대교수·문학평론가
소설가 최서해를 아는 분은 무척 많으리라 믿는다. 그의 소설 태반이 살인이나 방화로 끝난다는 것도 꽤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방화와 살인이 요즘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묻지마 범죄'에 해당한다는 걸 알고 있는 분은 많지 않을 듯싶다. 그런 분들을 위해 '기아와 살육'이라는 단편을 잠시 소개할까 한다. 1925년에 발표한 단편이니 무려 87년 전 작품이다. 주인공 경수는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을,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현실로 살아가는 가장이다. 늙고 병든 어머니와 산후조리를 잘못해 깊은 병을 앓는 아내, 세 살배기 딸과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해 간다. 가난과 사람들의 업신여김, 자신의 무능에 대한 자책으로, 이 젊은 가장의 심리는 나날이 최악을 향해 치닫는다.
시대를 뛰어넘는 소설의 현재성
그에게 굶주림은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그래도 그건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밀린 집세를 내라는 주인의 가혹한 독촉에 시달릴 때, 하루에도 몇 번씩 전신이 빳빳이 굳어지면서 발작을 일으키는 아내를 볼 때, 그런 아내를 위해 약 한 첩 쓸 돈이 없는 자신의 궁핍을 실감할 때마다, 그의 인내는 종종 한계에 도달한다. 소설에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있는 놈은 너무 있어서 걱정하는데 한편에서는 없어서 죽으니 이 놈의 세상을 거저 두나!' 경수는 이렇게 생각할 때면 전신의 피가 막 끓어올라서 소리를 지르고 뛰어 나가면서 지구 덩어리까지라도 부숴놓고 싶었다." "그는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모두 죽어라 하고 온 식구를 저주했다. 모두 다 죽어주었으면 큰 짐이나 벗어 놓은 듯이 시원할 것 같다." 사건이 일어나던 그 날, 아내의 발작은 유난히 격렬했다. 경수는 저러다 아내가 진짜 죽지나 않을까 겁이나 의원을 불러 외상으로 응급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약국에서는 문전박대를 당한다. 낙망하여 집에 와 보니, 이번에는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간 노모가 중국인 지주의 개한테 물려 참혹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업혀 왔다. 노모는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채 죽어가고 있었다. 경수는 마침내 이성을 잃고 폭발하고 만다. "아아, 부숴라! 모두 부숴라! 소리를 지르면서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식칼이 쥐어졌다. 그는 으악 소리를 지르면서 칼을 들어서 내리찍었다. 아내, 학실이, 어머니 할 것 없이 내리찍었다. 칼에 찔린 세 생령은 부르르 떨며, 방안에는 피비린내가 탁 터졌다." 비명을 지르면서 집밖으로 뛰어나온 경수의 칼부림은 계속된다. "경수의 눈앞에는 아무 거리낄 것, 아무 주저할 것이 없었다. 상점이 보이면 상점을 짓부수고 사람이 보이면 사람을 찔렀다.(…)내가 미쳐? 내가 도적놈이야? 이 악마 같은 놈들 다 죽인다!" 경수의 이 광란의 살육은 중국인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이른바 '묻지마 범죄'에 관한 보도가 연일 언론에 오르내릴 때, 나는 문득 최서해의 소설들이 떠올랐다. 이 소설의 배경이 일제하 만주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가난함의 정도도 상대적 차이일 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최서해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묻지마 살인'의 원인과 배경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이웃의 수많은 '경수들'
대상을 특정(特定)할 수 없는 원한과 분노의 폭발이 궁핍과 소외, 차별과 멸시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묻지마 범죄'는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배와 수탈을 원인으로 지목하면서도, 오늘의 '묻지마 범죄'는 개인의 윤리적 일탈과 심성 탓으로 돌리는 건 이율배반이다. 90년의 시차가 존재하지만, 경수의 행위와 오늘날 '묻지마 범죄'는 같은 뿌리에 닿아 있다. 빈부귀천과 소외를 오로지 개인 능력과 경쟁원리의 결과로만 돌리고 일탈과 실패의 원인을 개인 탓으로만 한정하면, 예나 지금이나 무수한 '경수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수원역과 여의도에 나타났던 경수는 그 수많은 '경수들'의 일부다. 최서해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경수는 네 이웃에 있다. 그가 '괴물'이 되기 전에, 그에게 관심과 사랑을 건네라. 그의 '신음'이 '절규'로 바뀌도록 내버려두지 마라. 사회는 개인을 보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