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인+간)] 부산 노리단 대표 안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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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단원이 툭 치며 "밥 먹었어?" 수평의 유쾌함으로 노니는 이곳

지난 14일 사상구 다누림센터에서 열린 노리단 1주년 기념 행사장에서 만난 안석희 부산 노리단 대표. 정종회 기자 jjh@

 '이지'란 별명을 쓰는 단원의 어머니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지가 전 직장에 출근할 때는 아침마다 어두운 표정이었는데, 노리단에 들어오고 나서는 좋아하는 걸 해서 그런지 매일매일 행복한 표정이에요.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허벅지에 멍이 시퍼렇게 들었는 데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밤새도록 일하면서도 행복하대요.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그리 행복해하나 싶었어요. 자녀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려고 하면 승낙해 주세요."

작곡가 '유인혁' 본명은 '안석희'
노리단서 '도리'로 불리는 이 남자

과 선배 안치환 노래 듣고 반해
노래패 가입, 민중가요 세계로
예울림→꽃다지로 전국 돌며 공연

하루 날밤 새우며 쓴 '바위처럼'
노동자들에게 인기곡으로 큰 사랑
"현장서 들으면 내 노래 아닌 느낌"


우레 같은 박수소리가 강당을 메웠다. 지난 14일 부산 사상구 학장동 다누림센터에서 열린 부산 노리단 1주년 기념행사. 쉼 없이 악기를 두드리고 춤추는 단원들의 몸짓에서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에너지가 뿜어 나왔다.

다음 아카데미 기획자, 테드엑스(TEDx) 해운대 오거나이저, 건축사무소 출신, 사회학 박사, 독립영화감독, 대안학교 출신에 이르기까지 11명의 부산 노리단 단원 중 음악이나 예술 전공자 한 명 없지만, 잠시만 지켜보고 있어도 그들의 유쾌한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나이나 경력을 넘어서 수평적으로 소통하는 문화를 만들자는 의미에서 닉네임을 씁니다. 저도 '도리도리'라는 말에서 따와 '도리'라는 닉네임을 쓰는데요, 열여덟 살 먹은 단원도 어깨를 툭 치면서 '도리, 밥 먹었어?' 이래요. 수평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살가워요."

안석희(45) 부산 노리단 대표가 무대에 올라 하반기 사업 계획을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하고 싶은 일로 세상을 바꾼다'는 취지로 부산 노리단이 창단된 지 1년이 됐다. 그 중심에 안 대표가 있다.

그는 살면서 세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안석희, 민중가요를 만들면서 필명으로 썼던 유인혁, 노리단 활동하면서 사용하는 도리. 같은 인물인가 싶을 정도로 이름을 쓴 기간마다 삶의 궤적이 다르다. 

'한내'와 '고몽'이란 재미난 이름의 악기와 함께.

■ 안석희

"철학과나 교대 쪽으로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사회사업과 쪽을 권하셨어요. 한참을 실랑이하다가 들어간 게 85년 연세대 사회사업학과였어요." 같은 과 82학번 선배가 쓴 학부 논문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칠레 아옌데 정권하에서의 사회사업가의 역할'이란 논문이다. "사회사업가도 혁명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음악이 더 재미있었어요."

'민중가요'와의 만남은 1985년 대학 들어온 뒤 처음 간 과 수련회에서였다. "84학번 안치환 선배가 노래하는데, 너무 멋지게 부르는 거예요. '울림터'라는 학교 노래패에서 활동하던 안 선배에게 그랬죠. 저도 들어갈 수 있을까요?" 고등학교 때 친구 따라 교회에 간 뒤 음악에 빠졌던 그는 대학에서 진보적인 복음성가도 처음 접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울림터에서 활동하면서 음악이 운명처럼 끼어들었다. "음악을 직업으로 할 생각은 없었어요. 3학년 2학기 마치고 울림터 동문끼리 졸업연주회를 열었는데, 속된 말로 대박이 났어요. 한 번만 하고 흩어지려다가, 우연히 울림터 동문끼리 만든 게 '예울림'이었어요. 노동자노래단과 뭉쳐 다시 '꽃다지'로 이어졌고, '노래판굿 꽃다지' 일원으로 전국을 돌면서 책에서 본 노동자를 직접 만나게 됐어요."


■ 유인혁

"본명으로 민중가요를 쓰면 잡혀가던 시절이었어요. 별 뜻 없이 유인혁이란 이름을 지었어요. 88년 말부터 그 이름을 쓰기 시작해 2003년까지 그 이름으로 살았어요. 민중가요판에 15년 있었던 셈이죠."

민중가요 작곡가로 뜬 곡이 1991년에 쓴 '사람이 태어나'. '사람이 태어나서 세 번을 운다지만/노동자는 오직 한 번 동지를 위해 운다/끝없는 노동 속에 우리 젊음 흘러가도/머리띠를 묶으면 다시 또 청춘이다.' 트로트풍이 가미돼 저절로 입안에서 가락이 맴돈다. 일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는 못 쓸 거라는 선배의 단언에 오기가 생겨 만든 곡이라고 했다.

"현장에서 제 노래를 들으면 낯설어요. 큰 집회에서 몇 천 명이 신 나게 춤추면서 부르고 있으면 이건 내 노래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노래 만드느라고 몇 백 번을 불러 보는데, 혼자서 기타 치면서 마디 적어 나가던 그 노래가 아니었어요. 이걸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를 대중에 알린 노래는 1992년에 쓴 '바위처럼'이란 곡이다. '바위처럼 살아가 보자/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바위처럼 살자꾸나//바람에 흔들리는 건/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대지에 깊이 박힌 저 바위는/굳세게도 서 있으리//우리 모두 절망에 굴하지 않고/시련 속에 자신을 깨우쳐 가며/마침내 올 해방 세상 주춧돌이 될/바위처럼 살자꾸나.'

'바위처럼'은 경쾌한 리듬과 희망적인 가사에 깜찍한 율동을 섞어 집회현장에서 요즘도 종종 듣는 곡이다. "누구나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가 됐으면 하고 만든 곡이에요. 즐겁게 손뼉 치면서 부르지만, 곱씹어 보면 뭔가 남는 그런 노래를 만들자고 했는데, 결과는 잘 만든 동요가 됐어요."

'바위처럼'은 하루 만에 쓴 곡이다. "음반의 제일 마지막 곡이었어요. 테이프 앞면에 6곡, 뒷면에 6곡이 들어가는데, 딱 한 곡이 모자랐어요. 하루 날밤을 새우면서 쓴 곡이 '바위처럼'이에요. 별다른 편곡도 못했어요."

'바위처럼' 굳건하다고 믿었던 낙관이나 희망에 지쳐갈 무렵 밴드를 결성했다. 1999년에 만든 유정고 밴드다. "큰 노래보다 소소한 노래를 부르고 싶었어요." 노래패 '새벽'에서 활동한 정윤경, 록밴드 '메이데이'의 기타리스트 고명원과 함께 유정고 밴드를 만들었다. "셋이 모여서 즉흥적으로 시작했어요. 이름도 각자의 성을 따서 유정고 밴드라고 붙였어요."

유정고 밴드 하면서 풍이 바뀌었다. "내게 소중한 게 뭔지, 싫어하는 게 뭔지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 들었어요. 물끄러미 신발 보면서 곡 쓰고, 골목에서 저거 예쁘구나 하고 곡 쓰고." 그렇게 어깨에 힘을 빼고 노래했지만, 피로감이 쌓이고 밴드 내부에서도 의견충돌이 빚어지면서 4년 만에 해체했다. 때마침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인 하자센터에서 대중음악팀장을 구하고 있었다.

안석희 대표 뒤의 대형종이인형이 `자그라`다.
좋은 노래 만들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아 

어느 날 우연히 문 두드린 아저씨 
신나게 채 휘두르곤 "잘 놀았어" 인사
'음악을 가지고 놀자' 깨달음 얻어 

한내·고몽·은몽·감돌·첸첸·스프로킷 
산업자재·재활용품으로 만든 악기들 
작지만 유쾌한 울림은 계속 된다

■ 도리

"하자센터는 직장 느낌이 덜 들었어요. 그땐 출근이 오후 2시였고, 음악으로 연결돼 있기도 해서 잘 맞겠다 싶었어요." 회사이자 공방이자 학교인 느슨한 마을공동체였다.

첫 만남은 곤혹스러웠다. "하자센터에서 채용 인터뷰를 하는데, 센터장인 조한혜정 교수가 아니라 10대 청소년 서른 명 정도가 쭉 둘러앉아서 진행했어요. 그때 전 30대 중반의 나이에 대중음악팀장으로 가게 된 건데. 처음엔 납득이 안 갔어요. 선후배 문화가 완전히 해체된 거예요. 나중에야 익숙해졌지만, 그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2004년 하자센터에서 11명이 모여 노리단을 창단했다. "왜 예술을 특별하게 여기고 어려워할까, 고민했어요. 그전엔 그냥 좋은 노래 만들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행복해하지 않았어요."

노리단이 만든 악기가 신기해 문을 열고 들어온 50대 아저씨와의 우연한 만남은 음악적 충격을 줬다.

"길 가던 50대 아저씨 한 분이 이상한 소리가 들리니까, 무슨 일 났나 싶어서 들어왔어요. '이게 악기야?' '쳐 봐도 돼?' 재활용 제품으로 만든 거라서 아무리 세게 쳐도 안 부서진다고 했죠. 마법에 걸린 것처럼 20~30분을 혼자서 이것저것 치면서 마구 돌아다니는 거예요. 물끄러미 옆에서 지켜봤어요. 신나게 놀고 나서 채를 주면서 그러는 거예요. '잘 놀았어.' 처음 왔을 때 표정과 돌아갈 때의 얼굴이 확 달라졌어요. 그 순간 알았어요. '이거야말로 일하는 사람들의 음악이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즐기다가 집에 돌아가서 '나 오늘 연주했어'라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내가 꿈꾸던 것이란 생각이 확 들었어요. 평범한 사람도 그 순간만큼은 예술가가 되는 거죠. 재미있게 음악을 가지고 놀자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50대 아저씨를 미치게 했던 노리단의 악기는 생활용품이나 산업자재처럼 전혀 악기가 될 것 같지 않은 물건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은 악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 호주의 생태주의 음악가 스티브 랭턴의 도움이 컸다.

"자동차 타이어 휠이나 화공약품통, 지중매설관 따위로 만들어요. 땅속에 전선 묻을 때 쓰는 지중매설관은 길이대로 자르면 음이 돼요. 길게 자르면 낮은음, 짧으면 높은음이 나요."

지중매설관을 이어 붙인 악기가 '한내'다. 스위스의 긴 나팔인 알펜호른을 팬플루트처럼 이어붙인 모양새다. "큰 강이 흘러가는 모양이라 '한내'로 이름 붙였죠. 길이와 폭이 4m쯤 되는 큰 악기인데, 지중매설관을 길이대로 서른 개가량 이어붙이면 4옥타브의 소리를 내요. 두드리는 악기인데 아이들은 미끄럼틀로 생각해서 기어 올라가기도 하고, 알펜호른처럼 불려고도 해요."

화공약품통을 드럼처럼 붙여 만든 '두둥', 나무로 만든 마림바인 '고몽', 알루미늄판으로 만든 '은몽', 자동차 휠을 튜닝해서 물레 위에 얹은 '감돌', 쇳조각을 크기별로 모아 만든 '첸첸' 같은 악기도 제작했다.

악기마다 이름이 재미있다. "은몽은 소리가 맑고 투명해서 은빛 빛줄기가 내려오는 것 같다고, 고몽은 소리로 재탄생한 오래된 나무의 꿈이라고 그리 작명했어요. 감아 돌아나는 소리가 난다고 감돌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주례문화O터 1층 작업실에서 재미난 악기를 발견했다. "지금 있는 악기를 탈 것에 다 실어보자 했어요.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수레 악기를 만든 거죠. '스프로킷'이란 악기가 그렇게 나왔어요. 삼단으로 만든 한내를 맨 뒤에 싣고, 양옆에 고몽과 은몽, 그리고 맨 앞엔 저음 악기를 달았어요. 8개의 악기가 실려 있어요."

지난 8일 영도구 남항대교 수변공원에서 `스프로킷`을 타고 공연을 펼친 부산 노리단 단원들. `영도다리축제`에 참석한 관객들의 혼을 빼놓았다. 강선배 기자 ksun@

■ 부산 노리단 대표

'서울 촌놈'인 그는 지난해 6월 부산으로 아예 이사를 왔다. "몇 년 전에 울산서 온 친구가 고시원에 살면서 서울 노리단에 다녔어요. 힘들지 않으냐고 했더니 여기서 배워서 울산 노리단을 만들고 싶대요. 지역에 노리단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말들이 오갔어요."

베트남에 노리단을 만들자는 제안도 왔고, 울산서도 노리단을 만들자는 말이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무산됐다. 도쿄 노리단도 추진하다가 대지진 때문에 멈춘 상태다. 그 와중에 우연히 부산서 노리단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다. "부산이란 말에 이건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손들었어요. 현지에서 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경험 때문에 아예 거처를 옮겼어요." 부산에 외가가 있어 낯설지 않은 것도 그에겐 힘이 됐다.

지난해 8월 15일 온천천 변에서 부산 노리단 창단공연을 했고, 지난 2월엔 주례 2동 폐가압장을 리모델링해 주례문화O터로 만들고 공간도 확보했다.

이웃 주민과 함께 호흡했다. 옆집 꼬마 다은이는 단골손님이 됐다. 마을 할머니를 모셔와 열무김치 담그는 법도 배우고, 비빔밥도 같이 비벼 먹었다. 부산의 축제현장뿐만 아니라 울산, 순천, 부천의 축제에도 참가했다. 시장 활성화 프로젝트를 위해 영도 남항시장에서 발바닥에 땀나게 돌아다니고, 사회적 기업을 창업한 청년의 경험을 공유하는 '멘붕멘창' 행사도 열었다.

숨 가쁘게 지나온 1년이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문화예술로 노는 게 쉽진 않다. "공연 연습하는 배우, 악기 제작하는 장인, 가르쳐야 하는 교사의 삶을 동시에 수행하는 걸 버거워하는 단원도 있어요. 노리단의 독특한 문화 속으로 들어오기 부담스러워하는 단원도 있었어요."

'스프로킷'과 함께한 부산 노리단 단원들.

사회적 기업가로서의 정체성도 낯설다. 특별한 지원을 받는 게 아니라 벌어서 단원 월급을 줘야 한다는 것도 압박이다. "최근엔 인생에서 안 할 것 같은 일만 골라서 해요. 숫자를 다룰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꼼꼼히 회계를 점검해야 하고, 기획서며 예산서를 써야 하고, 남들 앞에서 설명도 해야죠. 그래도 뜻밖에 이걸로 노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발견해요. 가사 쓸 때의 느낌과 비슷하게 기획서를 만들어요."

유인혁과 도리의 간극은 꽤 커 보였다. 유인혁으로만 알던 친구들은 그의 변신에 놀라기도 했단다.

지금 발을 담그는 강물이 어제의 강물이 아니지만 강은 유장하게 흘러가듯 안석희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큰 강인 '한내'의 울림처럼 유쾌하게 말이다.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약력

1985년 연세대 사회사업학과 입학

1989년 예울림 창단 멤버

1991년 8월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졸업

1991년 노동자 노래단과 통합한 희망의노래 꽃다지 음악감독, 대표

1994년 꽃다지를 나와서 프리랜서 작·편곡가로 활동. 스튜디오 모둠 대표

1999~2003년 유정고 밴드, 스튜디오 두레 대표

2000~2002년 누리네 음악 컨텐츠 제작 부팀장

2003~2004년 서울시청소년직업체험센터(하자센터) 대중음악팀장

2004~2007년 노리단 창단멤버, 예술감독, 악기 발전소장

2007~2010년 주식회사 노리단 대표이사, 공동대표

2011년~ ㈜ 부산노리단 공동대표, 대표이사


주요작업

1989년 예울림 1~3집

1991년 꽃다지 비합법 음반 1,2/노동가요 공식음반 1,2

1995년 조국과청춘 5집, 천지인, 손현숙, 김가영 등 다수 음반에 작곡가 참여

1999년 꽃다지 3집

2007년 이수진 1집

2006년 '위트&비트' 서울, 대구, 울산 등 80일 릴레이 공연 음악감독

2008년 마카오 아트페스티발,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참가

2009년 뮤직퍼포먼스 '플리즈' 음악감독

2010~2011년 에코 뮤지컬 '핑팽퐁'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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