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현대사 원폭의 진실] 1. 조선인 얼마나 희생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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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심지 옆에 집단숙소… 日 "폭격으로 조선인 1만 명 사망"

원폭 다음날인 1945년 8월 7일 히로시마 현과 시는 피폭 사망자 처리에 대해 긴급 지시를 내렸다. 수송이 곤란할 경우 현지에서 소각하거나 매장하라는 것이었다. 조선이 사체 상당수가 이렇게 처리됐다. 자료=피폭50주년 히로시마 시사(市史)

한국이 원자폭탄 피해국가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국민은 거의 없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수만 명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목숨을 잃은 비극의 현대사가 벌써 잊혀진 것이다. 일본은 전범국이면서도 '핵무기에 의한 세계 유일의 피해국가'라며 강변하고 있다. 반면 일제 식민정책의 희생양이 된 한국의 피폭자는 정부의 무관심 속에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본보는 피폭자 실태와 그들이 겪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피해 실상을 5차례에 걸쳐 집중 보도한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일본 히로시마시 550m 상공에서 TNT 2만t의 파괴력을 가진 원자폭탄이 터졌다. 전쟁 속에서 새로운 한주를 시작하던 히로시마는 12㎢가 초토화됐다. 사흘 뒤인 9일 오전 11시1분 나가사키에도 원폭이 투하돼 1만8천m 상공까지 버섯구름을 만들며 항구도시를 일순간 잿더미로 만들었다.

원폭의 영향을 60년 넘게 연구해 오고 있는 일본 방사선영향연구소(RERF)는 원폭 후 2개월에서 4개월 사이 사망한 피폭자를 히로시마 9만~16만6천 명, 나가사키 6만~8만 명으로 추산한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34만~35만 명, 나가사키에는 25만~27만 명이 살고 있었다. 단 두번의 원폭으로 인구 3분의 1 이상이 사라진 것이다.

일본, 원폭 당시 희생자만 집계
지연 영향 사망자는 포함 안 돼

일본 건너온 조선인 노무자들
집단생활하다 엄청난 피해
북한 피폭자 파악은 진척 없어

· 조선인 얼마나 죽었나?


피폭 6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선인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파악되지 않는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는 히로시마 5만, 나가사키 2만 명 등 총 7만 명이 피폭됐고 그중 4만 명(히로시마 3만, 나가사키 1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한다. 하지만 추정일 뿐이다. 원폭이 도시 전체를 송두리째 파괴하면서 기록이 소실된데다 몰살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인 노무자는 피폭 전 정확한 현황조차 파악되지 않은 상태였다. RERF가 추산한 피해자 수에 조선인은 포함돼 있지 않다.

1975년 히로시마·나가사키시 원폭재해지편집위원회가 펴낸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재해'에는 1944년 말 히로시마현(縣)에 8만1천863명, 나가사키현에 5만9천573명의 조선인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시(市)와 나가사키시의 조선인 수는 확인되지 않는다.

재해편집위는 히로시마 시내와 주변지역 조선인 수를 4만~5만 명이라 보고, 그 절반이 '소실권'(1~3km) 거주 지역에, 나머지가 주변 공장 등에 산재했다고 전제한 뒤 미·일합동조사단의 1945년 11월 '거리별 추정사망률'(1~3km 23.3%)을 적용해 사망자 수를 4천700명~7천명으로 추산했다.

원폭이 폭발한 중심점인 폭심지로부터 3~5km 범위에서는 추정사망률 1.9%를 적용해 2만 명 중 400명가량이 숨진 것으로 파악했다. 2.5~4km권에서는 2.6% 추정사망률을 근거로 3천 명 중 78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결국 재해편집위가 추산한 사망자 수는 5천~8천명 수준이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와 비교할 때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재해편집위는 나가사키에서는 조선인 1만 2천~1만 4천명 중 1천500~2천명 사망한 것으로 추산했다.

조선인 사망자 수는 재해편집위 추정치를 보더라도 최대 1만 명에 육박한다. 그러나 이는 원폭 직후 사망자만 나타낸 것이다. 상대적으로 낮은 방사선에 피폭돼 수년, 혹은 수십 년 뒤 암 등으로 사망한 피폭자는 포함돼 있지 않다. 방사선 피폭의 가장 두려운 점이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는 지연영향이란 점을 감안할 때 1만 명이란 수치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 조선인 피해가 컸던 이유

물론 일본의 식민지배 때문이다. 재해편집위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년)과 산미증산계획(1920~1933년)이라는 명목 하에 조선의 농촌사회는 수탈과 파괴가 극단에 달했고,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이 고향을 버리고 떠도는 신세가 됐으며, 상당수가 일본으로 가게 됐다고 분석했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전쟁국면이 확대되면서 노동력 부족현상이 심화되자 조선인 유입은 크게 늘었다. 일본 내부성 경보국(警保局) 자료에 따르면 1909년 790명 밖에 되지 않았던 재일조선인 수가 1940년 국민동원계획 등으로 급격히 증가하면서 1944년 12월 말 193만6천843명에 달했다.

일제가 조선인 노무자를 한곳에 몰아 살도록 한데도 원인이 있다. 히로시마의 경우 일본제강 공장과 일본군 내에 다수의 조선인 노무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후쿠시마마치, 칸온마치, 우지나, 히로세, 텐만, 오나가쵸 등에서 집단적으로 생활했다. 이 지역은 폭심지에서 1~4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나가사키 역시 폭심지에서 600m 떨어진 오하시마치에 미쓰비시제강소 조선인 징용자 숙소가 있었고 1.5~2.5km 거리에 있던 미쓰비시 병기 오오하시공장, 반지하 공장,스미요시 터널 공장 부근에는 6개소의 집단숙소가 있었다. 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에는 징용 노무자 2천500명이 있었고 그들 숙소는 폭심지에서 5km 남서쪽 키바치에 있었다. 조선인 피해자의 60% 이상은 경남 합천 주민으로 추정된다.

· 북한 원폭피해자는 어떻게 됐나

한국원폭피해자협회는 약 2천 명이 북한으로 귀국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추정일 뿐 북한지역 피폭자에 대한 소식은 일부 방북자의 입을 통해 전해질 뿐이다.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2006년 5월 15일 '북한 조선원자탄피해자협회가 피해자 실태에 대해 전면적으로 조사를 실시키로 했다'면서 피폭자 1천953명 중 900명가량이 생존해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북한 피폭자를 지원하기 위해 25번이나 방북했던 재일본조선인피폭자연락회의 이실근(83)회장은 지난 5월 10일 일본 히로시마 평화자료관에서 가진 본보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피폭자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1992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용순 비서가 실태조사를 약속했고, 1995년 2월 2일 '반핵과 평화를 위한 조선인피폭자협의회'가 결성됐다"면서 "당시 협회에 1천911명이 참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업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고, 2009년 382명이 생존해 있다는소식을 들었다고 이 회장은 말했다. 북한은 382명에 대한 명단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10월 히로시마현의사회, 일본의사회 회원 8명이 평양과 사리원에서 피폭자 10여명을 진찰했지만 북한 당국은 일본 의사의 체류와 약품 지원을 거부했다.

김기진 기자 kkj99@busan.com


■ 어떻게 취재했나

일본에서 15일간 히로시마, 나가사키, 도쿄, 후쿠시마 등 6개 지역을 돌며 방사선영향연구소 등 연구시설과 대학, 피폭자요양원, 시민사회단체 등을 집중 취재했다. 일본 국립공문서관, 외무성, 국회 등지에서 자료를 수집했고, 일본 도쿄 간다 고서점가를 뒤져 상당수 자료를 입수했다.

국내에서는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리는 경남 합천에서 피폭 1·2세 60명을 인터뷰했고 국회와 국립중앙도서관, 국가기록원,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강제동원위원회 등에서 자료를 입수해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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