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유물] ⑩ 금샘에 우뚝 솟았던 그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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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층 석탑 쌓으면 왜적이 침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덧붙였던 맨 아래쪽 기단부를 철거하고 난 뒤 제모습을 찾은 범어사 삼층 석탑. 하층 기단부 면석에 3개의 작은 안상(眼象)이, 상층 기단부엔 큼지막한 1개의 안상이 새겨져 있다. 강원태 기자 wkang@

한밤중 도깨비 떼가 청룡마을을 급습했다. 우스꽝스럽고 친숙한 도깨비들이 아니었다. 큰놈은 머리에 뿔이 두 개 났고 붉은 퉁방울눈에 송곳니가 툭 튀어나왔다. 큰 도깨비는 연신 껄껄거리며, "여봐라! 불 질러라. 곡식은 빼앗아라. 젊은 놈들은 모조리 잡아라!" 소리쳤고, 머리에 뿔이 한 개 난 졸병 도깨비들은 가랑이에 샅바 하나 달랑 차고 철퇴를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곡식을 약탈했다. 마을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고 일곱 살짜리 선재 혼자 용케 뒷산으로 도망쳤다.

도깨비들은 눈에 시퍼런 불을 켜고 벌떼같이 선재를 쫓아왔다. 선재는 캄캄한 산속으로 산속으로 죽을힘을 다해 기어 올라갔지만, 도깨비들과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설상가상 높은 절벽 용바위(무명암)가 앞을 가로막았다. 선재는 어디서 힘이 났는지, 단숨에 백 척 용바위를 뛰어넘고 원효봉 꼭대기까지 날아올랐다. 도깨비불은 시퍼렇게 용바위를 기어오르고 있었고 청룡마을 초가집들은 훨훨 불타고 있었다.

선재는 심호흡하고 하늘을 보았다. 멀리 동쪽 장산엔 우윳빛 여명이 밝아오고 검푸른 하늘엔 별들이 초롱초롱했다. 순간, 천지를 진동하는 범종 소리가 울리고 하늘이 두 쪽으로 쩍 갈라지더니 오색 무지개가 고당봉 불꽃 같은 바위 위에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야, 신기하다. 저기로 가보자! 선재는 무지개가 내려온 바위로 단숨에 뛰어갔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큰 바위 위에 우물이 있는데, 그 속에 금빛 물고기가 하늘에서 막 내려와 유유히 놀고 있는 것이었다. 야, 신기한 물고기네…! 입이 큰 물고기는 긴 수염이 좌·우측으로 두 가닥 길게 뻗었고 부리부리한 눈망울에 사슴 같은 뿔이 위엄 있게 솟았고, 몸통을 금빛 비늘로 감쌌다.

뒤쫓아 온 도깨비들은 바위 주위를 돌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 금빛 물고기에게 도와달라고 하자.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분명 도깨비들을 쫓아 줄 거야. 선재는 합장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금고기야, 금고기야! 도깨비들을 쫓아다오."

꼭 대답이라도 하듯 금빛 물고기가 두 번 입을 뻐끔하더니 거짓말같이 요동치며 힘껏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시퍼렇게 온 산을 덮은 도깨비불들은 눈 깜박할 사이에 재가 되어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선재는 만세, 만세! 하고 소리를 질렀다. 금빛 물고기는 다시 한 번 펄떡이며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고, 우물 속에서는 삼층석탑이 우뚝 솟아올랐다.

선재는, 금고기야, 금고기야! 외치다 깼다. 신기한 꿈이었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할아버지는 선재 손을 잡고 동냥을 나갔다. 왜구들의 두 차례 야간 급습으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마을에 온전한 집과 먹을거리는 눈 씻고 봐도 없었다. 젊은 장정들과 아낙네들은 왜구들에게 잡혀가거나 죽고 마을엔 운 좋게 살아남은 늙은이나 어린아이들 몇몇이 고작이었다. 수릿날이라고 하지만 그네를 타는 사람도 없었고 씨름을 할 사람도 없었다.

그나마 피해가 작은 산속 승려들이 곡식을 풀어 백성에게 나누어주자, 사람들은 마을을 버리고 산속 금성마을로 피난 갔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젊은 승려들은 "여러분! 왜구들이 또 쳐들어올 것입니다. 산속이라고 안전할 순 없습니다. 성을 쌓고 싸웁시다." "옳소! 싸웁시다. 늙은이들도 힘을 보태겠소." 사람들은 앞다투어 싸울 것을 다짐했다.

사람들은 금정산 50리 능선을 따라 성곽(금정산성 18.8㎞)을 쌓았다. 파류봉에서는 황산강(낙동강)을 타고 올라오는 왜구를 감시했고, 계명봉이나 쌍계봉에도 봉수대를 설치하여 밤낮없이 파수꾼을 자원했다.

신라는 막 삼국을 통일했지만, 곳곳에 남아있던 백제와 고구려 부흥군의 반란과 당과의 전쟁으로 왜구에 대항할 틈이 없었다. 그 틈을 왜구들은 집요하게 공격했고 신라 군사가 출동하면 바다로 도망갔다. 문무왕은 골머리를 앓았고 부처의 힘으로 왜구를 퇴치하고자 했다.



원효는 서라벌에서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불국(佛國)을 만들기 위해 여념이 없었지만, 해안가 백성의 피해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원효는 백성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먼저 금정산에 올라가 지세를 살피기 시작했다.

"옴…! 바다 건너 대마도가 한눈에 들어오고, 낙동정맥의 세를 받은 산마루가 첩첩이 파도를 타듯 출렁이는구나! 산마루 불꽃 같은 바위는 화성, 산 전체는 토기가 윤택한 토성, 화생토(火生土)의 상생(相生)이다. 분명 음양오행의 조화를 이룬 진산(鎭山)이야! 그렇지, 바다 건너 왜구의 본거지 대마도는 지네의 형국이다. 지네를 잡기 위해선 닭이 필요해…. 닭!"

원효는 대마도가 바로 보이는 봉우리에 자웅석계(雌雄石鷄)*란 대마도를 쪼는 듯한 암탉과 수탉 모양의 바위를 만들고, 닭이 운다고 하여 계명봉이란 이름을 붙였다. 남쪽 정상에 있는 큰 바위를 쌍계봉이라 명명했다. 자원해서 50리 산성을 쌓고 파수를 보던 백성을 독려하자 백성도 힘이 났다.

원효는 미륵봉 좌선바위(현 미륵사) 아래 가부좌를 틀고 보다 효과적으로 왜구들을 물리칠 방법을 강구했지만 자신의 힘으론 뭔가 부족한 것을 느꼈다.

"범천왕(梵天王)의 힘이 필요한데…, 범천! 산세로 봐, 이 산에 분명 범천왕의 힘이 미치는 영지가 있을 듯한데? 옴……!"



선재는 나무 그늘에 앉아 산성을 쌓으러 간 할아버지를 기다리다 문득 꿈이 생각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꿈이다. 꿈에 나타난 도깨비는 무섭고 징그러웠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신기한 물고기가 보고 싶었다. 그래, 정말 신기한 금고기야!

선재는 혼자 산을 올랐다. 산은 험하지 않았고 한참 올라가니 용바위가 나왔다. 청룡마을에서 늘 올려보던 바위다. 처음 와 보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고 꿈에 본 풍경과 똑같았다. 용바위 옆으로 산길에 올라서니 사방이 탁 트여 고당봉의 불꽃 같은 바위들이 눈앞에 펼쳐졌고 바람이 불어와 상쾌했다.

선재는 꿈을 꾸듯 이상한 기운이 몸속으로 마구 들어오는 것 같았다. 다시 심호흡하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좌측으로는 사시골 위쪽에 좌선바위가 보이고, 금성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돌멩이를 지고 줄줄이 산을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오솔길을 따라 선재는 힘차게 고당봉으로 향했다. 언젠가 본 말 탄 화랑들의 모습을 흉내 내어 말을 달리듯 오솔길을 뛰어갔다. 화엄벌(등산문화탐방센터 주변) 옹달샘(세심정)에서 물을 마시고 일어서는데, 웬 노스님 한 분이 다가왔다. "아가야! 나도 물 한 모금 주겠니?"

얼굴은 온화하고 풍채는 당당한 스님이었다. "예, 시님."

선재는 할아버지가 스님을 보면 인사하는 식으로 두 손을 모으고 절을 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난 노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혼자서 어디로 가는 길인고? 산속이 무섭지 않니?"

"예, 시님, 하나도 안 무섭습미데이. 큰 물고기를 찾으러 가는 기라예."

"…큰 물고기? 아가야, 물고기는 바다나 강으로 가야지. 어찌 산꼭대기로 물고기를 찾으러 가느냐?"

"시님! 저 산만등이에 큰 우물이 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금고기가 있는 기라예."

"뭐, 하늘에서 내려온 금고기!"

순간 원효는 깜짝 놀랐다. 아니! 하늘에서 내려온 금고기라면, 범천왕의 범어(梵魚)가 아닌가. 그럼, 이 아이가 말하는 곳은 내가 그렇게 찾고 있던 범어가 내려와 논 샘(井)을 말하는 것인가? 원효는 믿어지지 않았다.

"아가야. 넌, 범어, 아니 금고기를 본적이 있느냐?"

"예. 꿈에 봤습미데이." 대답하는 선재의 눈동자에선 호연지기가 넘쳤다.

"꿈에…!"

선재는 꾼 꿈을 원효에게 말해주었다. 원효는 기뻐하며, 두 손을 모으고, "어서 앞장서십시오."

선재는 꿈에 본 길이 생생하게 생각났다. 우거진 숲 속을 이각(刻)정도 오르자, 산마루에 집채만 한 바위가 있고, 바위 꼭대기에 큰 우물이 있는데, 눈짐작으로 둘레가 10자(尺)쯤 되어 보였다. 원효는 첫눈에 범어가 내려온 성소란 것을 감지했다. 두 손을 모으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며칠 후, 원효는 파수꾼으로부터 급보를 받고 미륵봉으로 올라갔다. 과연 수천 척의 배가 부산포 앞바다에 새까맣게 진을 치고 있었고, 사람들은 10만 왜구라고 입을 모았다. 원효는 싸우지 않고 돌려보낼 방법으로, 좌선바위 꼭대기에 왜구들이 무서워하는 김유신 대장군깃발을 꽂아 마치 대장군의 군사가 주둔한 것처럼 거짓 작전을 펴고, 급히 의상에 파발을 띄웠다. "의상대사, 선재동자의 가피로 범어가 내려 온 곳을 찾았소. 대왕과 함께 친히 금정산 금샘에서 화엄신중경(華嚴神衆經)을 독송하시오. 그 정성에 따라 범천왕의 범어가 내려와 왜구를 위압하게 되어 자연히 물러갈 것이오."

원효는 의상에 선재의 꿈 얘기를 해 주었고, 의상은 문무왕과 금샘에서 지극정성으로 밤샘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칠 일째 되는 날,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고 엄청난 태풍이 불어, 부산포 앞바다에 포진한 10만 왜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의상이 "범어의 가피로 왜구들은 물러가겠지만, 후대에 왜적이 또 침략할 수 있습니다. 금정산에 범어사(梵魚寺)란 절을 짓고 삼층석탑을 쌓으면 다시는 왜적들이 침략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진언 드리자 문무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다음 해 가을(678년, 문무왕18년), 청룡마을에서부터 오색연등이 하늘을 덮고 목탁소리가 온 산에 울려 펴졌다. 범어사 앞마당에 괘불(掛佛)이 높이 걸리고, 문무왕 좌·우측으로 의상과 원효가 앉고 시중들과 신라의 내로라하는 귀족, 승려들은 모두 자리를 잡았다. 낙성식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구름같이 범어사로 범어사로 몰려왔다.

할아버지 손을 잡은 선재는 사람들 사이로 대웅전 앞 삼층석탑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할부지, 저 탑은 내가 꿈에서 본 탑이다!"

분명 금고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금샘에 우뚝 솟았던 그 탑이었다.





자웅석계(雌雄石鷄)

범어삼기(암상금정, 자웅석계, 원효석대) 중 하나, 야사에 의하면 일본은 한반도를 천년 이상 침략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자웅석계바위 때문이라 생각하고 구한말 파손함. 지금은 계명봉에 흔적만 있음.



범어사 삼층 석탑 / 통일신라시대

기단·탑신 면석에 조각 장식
신라 후기 석탑 특색 잘 드러나


부산의 명산인 금정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범어사는 삼층 석탑(보물 250호), 대웅전(보물 434호), 조계문(보물 1461호),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보물 1526호)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부산의 최대 사찰이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빛이 금색을 띠는 우물이 산마루에 있는데,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梵魚)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해서 금정산이라 이름 짓고, 절을 지어 범어사라 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범어사창건사적'엔 신라 흥덕왕 때 왜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했다고 기록돼 있다. 흥덕왕(826~835)과 702년 죽은 의상대사와는 시기가 맞지 않아 이 사적기를 그대로 믿을 수 없지만, 범어사가 왜구를 진압하기 위해 세워진 호국 성격의 비보사찰임은 짐작할 수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 석탑은 양식으로 보아 흥덕왕 때인 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탑은 불상과 더불어 가장 중심이 되는 불교의 예배 대상으로 불교도들의 신앙과 정성이 깃든 불교미술품이다. 이 삼층 석탑은 전체 높이가 4m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삼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의 석탑이 지방으로 전파되면서 규모도 작아지고 기단이나 탑신의 면석에 조각이 장식되는 신라 후기 석탑의 특색을 보여준다. 상층 기단과 하층 기단의 각 면에 안상(眼象)을 조각하였으며,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하나의 돌로 이뤄졌다. 옥개 받침이 4단이며, 상륜부(上輪部)에는 상륜의 대부분이 없어지고 노반(露盤)과 후대에 만든 보주(寶珠)만 남아 있다.

최정혜/부산박물관 유물관리팀 팀장


신선 / 소설가

201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단편 '봄꿈' '경칩' '금고기야, 금고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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