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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장면 보고 여전히 설레는 건 다행스럽고, 다행스러운 만큼 한심하다. 예컨대, 남자가 무릎을 꿇고 선물로 사온 구두를 신겨주는 장면. 그 구두는 코랄빛이고, 제 돈으로 사기에는 너무 굽이 높아서 비효율적인데다가 너무 비싸고 너무 화려한 것. 그런 자주 신지 못할, 소용이 잘 닿지 않는, 없어도 괜찮은, 잉여의 신발을 사 온, 세상 물정 잊은 남자 앞에서 편안한, 그러나 나름 스타일이란 게 있는 옷을 입고 서 있는 장면. 지금까지 문장들이 대부분 모두 명사로 끝난 건 그 부러움과 설렘과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의 긴장 때문일 것이다.
<신사의 품격>이란 드라마에 그런 장면이 나왔다. 드라마 속 장동건의 나이도 마흔이고, 김하늘도 삼십대다. 실제 장동건의 나이도 마흔하나이고, 김하늘의 나이도 서른다섯이다. 다시 말해 사십대 전후의 사랑이다. 그들의 연애는 이십대보다 안정되고, 이십대만큼 창의적이고, 이십대보다 더 모험이 있다. 연애의 모험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직업이 탄탄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연애를 보는 사십대 아줌마는 설레어 하면서 한심해 하는 것이다.
앞으론 그런 드라마 안 봐야지, 까지 생각하는 건 아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무리 부러워하더라도 책 몇 페이지 읽고, 원고 몇 장 쓰고, 설거지를 하거나, 쓸쓸한 음악 몇 곡 들으면 금방 잊히니까. 삶은 그 드라마 장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과 얄팍한 원고와 설거지를 할 때 남은 음식물 찌꺼기와, 쓸쓸한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삶에 있으니까. 그러니 잠깐 부러워하도록 내버려 두자. 잠시 꿈이라도 꾼다면 그것조차 방치하자. 스스로를 꾸짖고, 용서하고, 그럴 필요는 없다.
잘 생각해 보면, 중년의 판타지는 그런 빛나는 구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아니다. 오히려 최백호가 젊은 음악인 박주원과 함께 한 노래 <방랑자> 같은 것에 그 판타지는 너무나 현실감 있게 등장한다. 
저 바람처럼 영원히 쉴 곳 없는 / 어디인가 외로운 방랑자여 / 저 구름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 어디선가 날 볼 듯한 그대여 // 사막에서 길을 찾는 / 갈길 없이 떠도는 형형색 모래알처럼 / 나도 그 길 걸어가네 / 어린왕자 되어 / 장미꽃처럼 넌 뜨겁지는 않아도 / 나에게도 그런 사람 있다 (하략)
이런 가사. 최백호 특유의 지친 모습이 ‘바람’, ‘방랑자’, ‘외로움’, ‘떠도는’ 등등의 말들의 메타포가 된다. 저음의 바이브레이션은 박주원이 연주하는 저음의 기타보다 더 악기 같다. 예순이 넘은 이 가수의 목소리는 다행히 전혀 구수하지 않고 여전히 우수에 젖어 있다. 그래서 ‘이런왕자 되어’라는 가사가 어색하지 않다. 최백호의 또 다른 노래 <낭만에 대하여>는 차라리 그에게 미래의 노래였다. 예컨대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라는 가사는 “장미꽃처럼 넌 뜨겁지는 않아도 나에게도 그런 사람 있다” 다음에 올 법한 가사였다. 그러니까 최백호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방랑자>를 부른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조금 흐트러뜨리고 청바지나 골덴바지를 입고 캐쥬얼한 면자켓을 입고 늙지 않는 음유시인처럼 노래를 하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는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 장동건이 김하늘에게 코랄빛 구두를 무릎 꿇고 건네는 장면보다, 최백호가 무심하게, 보사노바 스타일로, 그러나 보사노바 특유의 세련됨을 모두 버리고 건조하게 누군가를 향해 고백하는 듯한 장면에서 차분한 판타지를 꿈꾸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판타지인 이유는 이 시대 평범한 중년인 우리는 자신의 외로움을 커밍아웃할 수도 없고, ‘어디선가 날 볼 듯한 그대여’라고는 더더욱 말을 던질 수 없으며, ‘어린왕자’ 운운하는 것은 낯간지럽다고 생각하며, ‘나에게도 그런 사람 있다’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읊조릴 자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백호의 노래에 기대 쓸쓸한 판타지를 즐겨 보는 것이다.
내친김에 최백호의 80-90년대 동영상을 본다. 그의 눈은 장동건의 눈보다 맑다. 장동건의 화려한 반짝임이 아니라 마치 약간 울고 난 후의 투명함이 있다. 20-30년 전 최백호의 얼굴 속에 지금의 얼굴이 보인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사람의 얼굴은 미리 디자인 돼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실은, 내 얼굴에서도 문득문득 미래의 얼굴을 볼 때가 있다. 미래를 잠깐 엿보는 듯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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