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진을 재발견하다 신진작가 포트폴리오] ⑦ 벽 속의 사람 / 이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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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놀이

벽 속의 사람

이순남의 '벽 속의 사람'은 연출을 통해 재현한 사진이다. 굴뚝과 공장으로 상징되는 회색 도시, 울산에서 공장을 짓기 위해 쫓겨나 '신화' 마을이라는 이름 아래 자리 잡은 사람들을 상대로 한 작업이다. 연출 사진에서는 실재의 재현이라는 사진의 가장 고전적이고 원초적인 정체성이 크게 훼손당한다. 사진이란 보이는 것을 과학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라는 정의가 이제는 완전히 고답적인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사진에서 뭔가를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성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진이 재현하는 것이 실재가 아니라면 도대체 뭘 재현한다는 것인가?

이 연출 사진의 키워드는 환상과 벽이다. 환상과 대면하는 것, 그것이 작가의 작업 의도다. 신화와 실재를 벽과 삶 속에서, 연출과 기록 그 앙상블 속에서 찾는다. 모두가 환상적으로 대구를 이루는 짝이다. 그러한 환상의 벽에서 실재의 삶을 본다. 노인이 벽을 보고 있다는 지표가 의미하는 것, 그 서 있는 자세가 어색할 정도로 꼿꼿한 것, 나비와 꽃, 온갖 존재하지 않는 혹은 존재할 수 없는 이미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중 하나라는 리히텐슈타인이나 마티즈의 그림으로 뒤덮인 신화의 벽 앞에 선다는 것, 사진이 담는 이런 여러 행위의 지표는 벽을 사이에 두고 존재하는 신화와 실재 사이의 모순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순남의 사진 안에는 세부 묘사가 없다. 오로지 벽을 향해 선 연출의 의도만 있을 뿐이다. 결국, 환상의 벽과 그 환상의 벽을 바라보는, 카메라와 작가라는 재현의 주체에 등을 돌리는 존재밖에 없다. 벽이 구조이고, 신화가 정체성이며, 환상이 그 이야깃거리인 공간이다.

여기에서 재현하는 주체에 등을 돌리고 환상을 향하는 노인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진에서 작가가 의도하는 것은 작가만 알 뿐이다.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떻게든 해석할 수도 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은 모두 나타난 이미지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난, 이 시대의 예술은 평론가의 권력에서 벗어나고 갤러리의 자본에서 벗어나 놀이로 가야 한다고 믿는다. 사진이 이제 이미지로서 존재자의 의미를 재현하는 것을 허락받았다면, 누구나 그 '의미'의 세계에서 예술의 경지를 마음껏 누려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순남의 '벽 속의 사람'은 우리 시대 누구나가 반추할 수 있도록 대중 속으로 들어온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놀이의 예술이다. 글=이광수 사진평론가

공동기획





◇약력=1958년 부산 출생. 동서대학교 강사. 단체전 젊은 사진가 모임-'미래색'(1993년, 대구 대백플라자갤러리), 부산 사진의 재발견-'징후로서의 사진'(2011년, 부산 고은사진미술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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