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인+간)] 추리문학관 20년:나의 인생 나의 문학 김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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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보다 어려운 건 '인생' 난 살아있고 그래서 쓴다, 운명처럼…

척박한 한국 추리문학계를 이끌어 온 소설가 김성종. 김병집 기자 bjk@

계단까지 새어나온 끔찍한 말에 나(이 형사)는 흠칫 놀랐다. "좀 더 잔인하게 죽일 수 없어요? 도끼로 찍는다든가 뭐 그래야 자극적이지 칼은 너무 흔하잖아." 잠시 주저하다 문을 열었다. '권총 찬 러시아 선원이 시내 활보'란 신문기사 스크랩이 책상 위에 버젓이 놓여 있는 것도 꺼림칙했다. "어험~ 어험~."헛기침 소리에 그제야 손님의 방문을 눈치채고 전화를 끊었다. "어떻게 오셨죠?" 낮은 목소리가 해운대 달맞이 추리문학관 4층 집필실에 깔렸다.


해운대경찰서 형사과 강력사건수사팀 소속 형사란 신분증을 보여주자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애써 해명했다. 연극 대본 중에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창작되는 과정을 묘사한 게 있는데, 그 대사 중 일부를 의논한 거라면서….

연극 대사란 사실에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28일은 추리문학관 20주년이었고, 31일과 4월 1일 이를 기념해 문인들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란 연극을 무대에 올린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던 터였다. 추리소설가 김성종(71)이 대본을 쓰고 연출도 맡았다고 했다.

1·4후퇴 때 어머니와 막냇동생을 잃었다
그때 내 나이 열세 살, 평생 트라우마 앓아…
조선일보 등단 후 쉬지 않고 신문 연재
부산일보와 인연으로 제2 고향 부산에 둥지
4만여 권 소장 '문학관' 만든 지도 벌써 20년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며칠 전 달맞이 문탠로드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한 단서를 구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파리 한 마리도 못 죽입니다." 난로 위의 주전자에서 따른 차를 권하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던졌다.

"범행수법이나 사건의 배경이 선생님의 소설 '안개의 사나이'를 빼닮았는데요." 그의 추리소설에 푹 빠진 동료 김 형사가 실제 경험하지 않고는 그런 글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한 말이 머릿속에 각인돼 있었다.

추리문학관 앞에 선 김성종.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담배를 입에 물곤 조곤조곤 이야기한다.

"서슬 퍼런 5공화국 시절, 청와대에서 손님이 온 적 있었소. '제5열'이란 추리소설이 나온 뒤였는데, 마침 그 소설처럼 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쏜 암살 사건이 일어난 거지. 10·26이야. 암살이나 경호와 관련된 자문을 하고 싶다고 하더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1995년인가. 아버지를 살해한 경제학과 교수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소. '킬러 교수'라고 떠들썩했지. 그 교수의 서재에 추리소설 한 권이 꽂혀 있었던 거야. 그게 고스란히 9시 뉴스에 방송되면서 추리소설이 무슨 살인지침서처럼 낙인찍힌 일이 벌어졌지. 당신도 그리 생각하오?"

이야기가 묘한 방향으로 흘렀다. 어,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입에서 속사포처럼 말이 터졌다.

"스타인벡이니 포크너, 버나드 쇼도 추리소설을 썼고, 펄 벅 여사도 추리소설을 남겼지. 순수니 추리니 하는 분류보다는 좋은 소설이냐 아니냐로 분류해야 마땅한 것 아니냐고?"

50여 편 100여 권에 달하는 책을 낸 국내 추리소설계의 대가답게 추리소설이 억울한 대접을 받는 데 대해선 목소리를 높였다.

대화의 주도권을 뺏길까 봐 화제를 돌렸다. 

"부산이 고향은 아니죠?" 중국 산둥성(山東省) 지난(濟南)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전남 구례에서 지냈다는 정도는 알고 있던 터였다.

"뭐라고요?" 요즘 들어 귀가 부쩍 어두워졌다면서 소리를 높였다.

"연고가 없는 부산엔 어떻게 오셨느냐고요?"

"그건 왜 묻소?"

"그냥 궁금해서요…." 머쓱해 주위를 둘러보다가, 최근에 출간된 '후쿠오카 살인'을 뒤적거렸다.

4만 권이 넘는다는 책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올라오면서 들른 3층 도서관은 물론이고, 5층 가정집의 소라 계단까지 온갖 책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한 권 한 권 내 손으로 산 것들이라오." 책 이야기가 나오자 비로소 상대에 대한 긴장을 푸는 듯했다.

"1980년에 부산에 내려왔으니, 벌써 30년이 넘었소. 부산일보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부산에 자주 내려왔지.(1980년 '안개 속에 지다', 1981년 '백색인간'을 부산일보에 연재했다.) 그때만 해도 남천동 삼익 비치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바다를 배경으로 올라가는 아파트가 너무 멋지더군. 그날 바로 비행기 타고 서울 가서 돈 가지고 내려와 계약했지."

말문을 트자 일사천리다. 
사적인 공간인 추리문학관 5층

"삼익 비치가 3천 세대쯤 됐는데, 책방이 하나도 없더라고. 그래서 삼익 비치 상가 2층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집'이란 책방을 냈지. 참고서를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2년도 못 돼 문을 닫았어. 하루에 책 한 권도 못 팔던 때도 있었지."

서울서 하던 출판사를 동생에게 넘기고 부산에서 '대작사'란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계간 '추리문학'을 10호까지 냈다는 이야기도 어디선가 들었다. 올여름엔 새로운 추리소설잡지 '스파이'를 낼 작정으로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말도 들렸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이력서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1969년 '경찰관'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1971년 '17년'으로 현대문학 최종 추천, 1974년 '최후의 증인'으로 한국일보 장편 소설 당선. 1975년부터 6년간 일간스포츠에 '여명의 눈동자' 연재, 1년 반 동안 같은 신문에 '제5열'도 가명 '추정'으로 동시 연재….

추리소설가이지만 그의 출세작은 추리소설이 아닌 대하역사소설 '여명의 눈동자'다. 일제강점기에서 6·25 전쟁, 빨치산 토벌에 이르는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는 소설로, 강제위안부와 학병으로 끌려나가는 최대치, 윤여옥, 장하림이 주인공이었다. 이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는 공전의 히트를 쳤고,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채시라와 최재성이 나눴던 뜨거운 키스 장면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장하림이란 인물을 너무 좋게 그리고, 최대치를 악질처럼 그린 건 마음에 걸려. 장하림이 이승만 암살에 엮여 사형당하는 것까지 구상했는데, 거기까진 쓰지 못했지. 중국이나 일본 쪽 자료도 더 참고해서 한국전쟁을 꿰뚫고 나가는 소설을 평생의 과업으로 쓸 작정이야."

'여명의 눈동자' '제5열' 등 
50여 편 100여 권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정 
추리소설 매력 뭐냐고? 
모순덩어리 세상 해부 
최고의 소설기법이지   

건물이라곤 거의 없던 
수십 년 전 달맞이언덕… 
그때 땅 사놨더라면 
문화벨트 만들었을 텐데


원고지 2만 장에 달하는 '여명의 눈동자'는 워낙 오랫동안 연재한 소설인데다, 장안의 화제를 불러 모은 출세작이라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그때만 해도 신문 연재로 밥벌이가 괜찮았거든. 근 20년 동안 쉬지 않고 신문 연재를 했지. 2편을 동시에 연재하기도 했어. 그럴 땐 마감 시간에 쫓기며 하루에 원고지 14장 분량을 마구 써댔지. 평생 글에 시달리다 죽을 것 같았어, 소설가 김내성이 1957년인가 경향신문에 '실낙원의 별'을 연재하다가 마흔아홉의 나이에 숨졌잖아. 그리 되고 싶진 않았어. 원고 쓰길 포기하고 친구들이랑 지리산 종주에 나섰지. 막상 노고단 산장에 누웠는데, 원고 걱정에 잠이 오지 않는 거야."

추리소설처럼 그의 이야기는 묘한 흡입력이 있었다.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그래서요?"

"숙소 한 귀퉁이에 엎드려 헤드 랜턴을 켜고 결국 원고를 썼지. 새벽 2시쯤 됐을 거야."

"원고를 어떻게 보냈어요? 그 산장에 팩스가 있을 리 만무하고."

"자는 사람들을 깨워서 동전을 다 거뒀지. 동전 한 움큼 가지고 공중전화 부스로 갔어. 부산 사무실 여직원을 깨워서 전화로 원고를 불러줬지."

'여명의 눈동자'는 결국 부산에 정착한 뒤에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김성종의 부인이 홍차를 들고 올라왔다. 추리문학관 기획실장 최애경(63)이란 명함을 건네준다. "38년 같이 살면서 처음 얻은 명함이에요."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는데요?"

"1971년인가 출판사에서 함께 일하다 만났어요. 74년에 결혼했지요."

부인의 말에 김성종이 한마디 거든다. "소설가 윤후명과는 '독서신문'에서, 시인 강은교와는 '진학'이란 잡지에서 함께 근무했소." 

미궁으로 빠져드는 듯한 추리문학관 계단에 선 김성종.

"왜 그리 자주 직장을 옮긴 거죠?" 또 담배에 불을 붙였다. 체인스모커였다. 몇 년 전 공개적으로 금연을 선언했지만, 담배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듯했다. 

"직장 생활이 체질에 안 맞았던 거지. 그런데 돈이 없으니 직장에 또 들어가야 했고.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한 거야."

"체질에 안 맞는 일을 또 하셨던데요?" 2006년 해운대구 제2선거구 시의원으로 출마했던 일을 떠올리며 던진 말이었다. 출판문화 지원, 문화광장 조성, 시민 사색공간 확충, 어린이도서관 건립 등을 공약을 내걸었지만, 낙선했다.

"시의원엔 왜 출마하셨던 거예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63학번이지. 앙드레 말로의 행동주의 문학이 좋아서 소설도 쓰고 정치도 하고 싶어서 정외과를 선택했지. '6·25 이후 한국현대소설의 정치성'이 학위 논문이야."

정치 이야기가 나오자 언성이 높아진다. "아파트값 내려가면 경기부양책이다 뭐다 해서 온갖 정책을 다 들고 나오지만, 출판 불황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시의원에 당선되면 달맞이언덕에 작은 도서관도 많이 짓고 싶었어."

2008년에 쓴 '안개의 사나이'에는 이상적인 달맞이언덕의 그림을 그려놓았다.

세계문학 거장의 사진 하나하나도 그의 손으로 수집한 것이다. 추리문학관 곳곳에 그의 숨결이 배어 있다.

'언덕의 중앙에 상당히 큰 분수 광장이 있다. 그 한쪽에는 등대를 닮은 도서관이 서 있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 길 한쪽에는 공방, 커피숍, 골동품점 같은 예쁜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광장을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가면 책의 거리가 나타난다. 달맞이언덕의 주 도로에는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대신 전기로 움직이는 버스들이 십분 간격으로 언덕 주위를 맴돌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면 된다.'

이상주의자의 성향이 짙은데, 왜 추리소설에 매료됐을까?

"세상의 구조적 모순을 파헤치기엔 추리 기법이 최고라오. 국가권력, 무기, 범죄, 핵 문제, 테러리즘 같은 광대한 소재를 다룰 수 있지." 그것뿐이었을까? 선문답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파괴해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고."

그 말이 음울한 기운을 퍼트렸다.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뜻밖에 '김영종'이란 이름을 내뱉었다.

"100일을 겨우 버티고 죽은 막냇동생이오. 아이 다섯을 데리고 만삭이던 모친 홀로 1·4 후퇴 때 해군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가 친척이 있던 여수 산비탈에 초가집을 얻었소. 어머니는 막내를 낳고 열이틀 만에 돌아가셨지. 영양실조였소. 어머니가 돌아가셨단 소식에 제주도에 징용 가셨던 아버지가 급히 오셨지만, 속수무책이었어. 아이에게 미군이 배급한 분유를 타서 먹였는데, 자꾸만 설사를 하는 거야. 100일 만에 죽은 막내를 궤짝에 담아 한밤에 아무도 몰래 산에 묻었지. 내 나이 열세 살 때요."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와 막냇동생의 죽음은 그의 세계관을 결정짓는 내면의 상처가 됐다. "남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하고, 한 걸음 뒤에서 관망하는 버릇이 그때부터 생겼지."

가난은 숙명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대학 다닐 때 자취하다가 서너 끼를 굶으니까 안 되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학교 식당에 찾아갔지. 밥만 주시면 청소든 뭐든 하겠다고. 친구놈도 같이 하겠다고 나섰는데, 그 친구는 며칠 못하고 그만뒀어. 친구들이 식당에서 손가락질할까 봐 창피했던 거지."

벌써 두 시간을 넘겼다. 여기 온 목적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의 이야기에 푹 빠졌다.

"후회하는 건 없나요?"

"제일 후회하는 거? 추리문학관 지은 거야. 20년 전만 해도 달맞이언덕에 갈빗집 하나밖에 없었지. 문학관에 대한 개념도 없었던 시절이고. 빚을 내서라도 땅을 더 샀더라면 일대를 문화 벨트로 만들었을 텐데. 일본 추리작가들이 오면 많이들 부러워해. 일본에는 추리소설작가만 1천 명을 헤아리는데, 작가기념관은 있지만 이런 추리문학관은 없거든. 하여튼, 추리문학관에 꼼짝없이 묶여서 나다니지도 못하는 게 후회되지." 그의 말과 달리, 그는 매년 겨울이면 일본으로 추리문학 기행을 떠난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유럽으로도 훌쩍 떠난다. 추리문학관이란 달팽이 집을 숙명처럼 이고 말이다.  글=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사진=김병집 기자 bjk@

※ 앞부분은 가상의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를 화자로 내세워 꾸민 글입니다.

김성종이 쓴 김성종

작품다운 작품 하나 제대로 쓰지도 못한 채 인생을 다 소진해 버렸으니 이런 얼간이가 또 어디 있을까. 도대체 머저리 같은 머리와 필력을 가지고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괴로움을 잊으려고 그렇게 방황한 것일까. 

일단 한 번 길을 잘못 들면 빠져나가기가 힘든 것이 창작의 세계인 것 같다. 그 매력은 경험해 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그 세계의 밑바닥에는 자유라는 감미로운 연인과 함께 고독이라는 냉혈한이 똬리를 틀고 앉아있다. 그 둘 사이에서 적당히 줄타기를 하면서 뭘 하나 만들어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건만 남아있는 것은 빈 껍데기일 뿐이다.

하지만 내일이면 또 펜을 들고 창가에 멀거니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관망하면서 뭔가 끄적거릴 것이다. 출세와 돈을 좇아,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가 되어 버린 이 괴물 같은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다가 식은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중얼거릴 것이다. 무의미를 의미 있는 것으로 포장하려는 행위가 또 하나의 무의미를 낳는 게 아닐까. 나는 또 의식의 잠행을 계속한다.

내가 아는 김성종

김성종, 그는 나이가 없다. 나이가 없으니 언제나 청춘이다. 늘 무언가 열정적으로 꿈꾸고 구상하고 작품 쓰는 일이 하루의 전부다. 계속 출간되고 있는 장편추리소설이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을 말해준다. 또한, 그는 장강(長江)과 같다. 함부로 감정에 출렁이지도 않고, 세파의 격랑에 일렁거리지도 않는다. 오로지 깊고도 먼 강으로만 흐른다. 그러니 그는 영락없는 소설가일 수밖에 없다.   문성수/소설가

 

외모부터 말을 하자면 그는 정장을 싫어한다. 그러나 티셔츠, 점퍼, 스웨터. 아무렇게나 걸친 옷들이 그의 몸에서는 패션이 된다. 이따금 기다란 줄에 이름표 같은 것을 붙여 목에 걸고 다니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도 그에게선 안성맞춤의 액세서리가 된다. 그의 내면에는 아직도 20대 꿈과 정열이 불타고 있다. 술을 마시다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굵고 감미로운 음성으로 노래하고, 불현듯 생각이라도 났다는 듯 유럽 일본 등지로 훌쩍 떠나버리는 사나이. 한마디로 그는 자유인이다.

 김헌일/소설가

 

언젠가 김성종 작가와 서울의 K 화백이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큰 덩치에 과묵 형이다. 사무실 밖에 급한 일로 2~3분간 나갔다가 들어오니 그때까지도 아무런 대화 없이 그냥 그대로 멀쑥하게 마주 앉아있었을 정도다. 작가 김성종의 과묵은 초면인 사람의 접근을 쉽지 않게 한다. 비즈니스맨이 아니었던 게 천만다행이다. 추리력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 일상사의 단면을 접할 때마다 그가 추리소설가라는 사실에 새삼 낯섦을 느낀다. 빤한 부산생활이 답답한 탓인가, 그는 달맞이언덕 추리문학관을 축으로 수시 외국 출타 중이다.  신옥진/부산공간화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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