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면] 역사 속에 사라진 직업들 / 미하엘라 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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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로 분장한 무대 위 저 사람은 양초 심지 자르는 촛불관리인 이랍니다

지식채널 제공

신문사에서 '생활의 달인'을 꼽는다면 문선공(文選工)이 첫손가락에 들었을 테다. 시대에 밀려 문선공은 자취를 감췄지만, 한때 신문사에선 절대적인 존재였다. 마구 휘갈긴 악필을 알아보는 것도 신기한데, 원고에만 눈길을 둔 채 활자를 뽑아내는 손놀림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민첩했다. 마감 시간을 맞추는 것도 그의 손에 달렸다. 문선공의 일자리를 뺏은 것은 컴퓨터였다. 컴퓨터 조판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달인의 기술은 하루아침에 쓸모없어졌다. 순식간에 뒷방늙은이 신세로 전락한 그들이 까마득한 후배에게 컴퓨터를 배우면서 내쉬던 한숨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다.

문선공처럼 숱한 직업이 지상에서 사라졌고, 새로운 직업이 생겨났다.

'역사 속에 사라진 직업들'은 유럽을 중심으로 한때 존재했던 독특한 직업의 생성과 소멸을 다룬 책이다. 시장이나 박람회장처럼 사람이 운집한 곳에서 양동이에 용변을 보라고 외치면서 손님을 불렀던 이동변소꾼, 개미를 수집해 새 모이나 약재로 파는 개미번데기수집상처럼 지금의 눈으로 보면 우스꽝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직업도 있다.

그중 하나가 촛불관리인이다. 가스등이 발명되기 이전에 극장에서 촛불관리인은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다. 무대 맨 앞쪽을 따라 한 줄로 촛불로 켜놓아 그 빛이 배우들을 밑에서부터 비추도록 했는데, 빈의 궁정극장에선 공연할 때마다 객석에 300개, 무대에 500개의 촛불을 놓아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공연 도중 조명용 양초에서 그을음이 과하게 나지 않도록 수시로 심지를 청소하거나 잘라내야 했다. 심지를 제때 잘라주지 않으면 금세 그을음이 피어오르고 촛농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괴테가 "청소가 필요 없는 양초보다 더 좋은 발명품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눈에 띄지 않고 그을음 나는 심지를 잘라내기 위해 촛불관리인은 공연 도중 배우로 분장(삽화)하기도 했다. 촛불관리인은 양초 심지를 관리하기 위해 공연 도중에도 수시로 무대에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연극의 일부로 인식되기도 했다. 심지를 자르는 일 외에도 화재를 방지할 책임도 있었다. 이런 막중한 역할을 맡았던 촛불관리인도 가스등이 도입되면서 가뭇없이 사라졌다.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문선공의 설 자리가 없어진 것처럼 말이다.

직업을 통해 유럽의 풍속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미하엘라 비저 글·이르멜라 샤우츠 그림/권세훈 옮김/지식채널/304쪽/1만 5천 원.

이상헌 기자 tt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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