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근대를 걷다] 3.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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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살부터 외벽까지 정교한 짜임… '적산가옥' 딱지에 가린 생활유산

정란각 2층의 연속 다다미방. 사진=김병집 기자 bjk@

근대 건축이 사라지는 데 '일본 잔재'라는 인식도 한몫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쓰라린 역사의 한 페이지임을 생각하면 쉽게 없애버릴 수 없다. 

숱한 얼룩이 묻어 있고 만감이 교차하는 한국 근대사의 유산은 부산 지역 곳곳에 남아 있는 일본식 주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소위 '적산 가옥'이라 불리며 부산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는 일제 주택 역시 거창하게 아름답지는 않아도 기억해야 할 공간이자 역사이다.

■ 실내 내부 공간 미로처럼 연결

부산시 동구 수정동 고관 입구. 기와지붕의 대문을 갖춘 고급 일본식 주택이 눈을 사로잡는다. 2007년 7월 등록문화재 제330호로 지정된 정란각이다. 이 건물은 1943년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때 지은 것으로 당시 건축주는 일본인 재력가 다마다미노루(玉田穰)로 상업무역과 섬유공업 등에 대주주로 참여했던 인물로 알려졌다.

마당에서 보면, 일본식 목조 2층의 기와지붕 건물로 일본 무사 계급의 전형적인 주거 양식인 쇼인즈쿠리(書院造·웅장한 지붕과 높은 천장, 넓은 실내공간, 화려한 장식이 특징)라는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쇼인즈쿠리 답게 건물의 외모가 풍기는 일면은 웅장해 보인다. 건물은 액자를 걸거나 도자기, 검을 진열하기 위해 만든 2층의 도코노마(장식물을 얹어두는 공간)를 비롯해 내부 공간, 목조 가구, 정원 등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 등 영화 촬영지로 인기를 끌었다. 2층에서는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나오는 '쯔즈끼마'(연속되는 다다미방)도 볼 수 있다.

본채는 'ㅡ '자형 2층 건물. 본채 1층의 남쪽과 서쪽에는 툇마루에 해당하는 복도가 'ㄴ'자형으로 설치돼 있다. 특이한 것은 1층과 2층 사이에 반 2층 공간을 두어 문간방 역할을 하도록 했으며,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을 여러 갈래로 만들어 집 내부를 좀처럼 한눈에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것. 실내 내부 공간이 복도를 통해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1940년대 지어진 건물이지만 최근 건축물들과 비교해 크게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점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2층 방에서는 아파트에서나 볼 수 있는 안방 화장실이 눈길을 끈다. 당시에는 앞이 탁 트여 있어 2층 방에서 부산항을 바라보는 전망도 괜찮았을 것으로 보인다.

창살 하나까지 일본풍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창호지를 외부에서 붙였는데 이는 우리 전통 양식과 반대다.

건물에 대해 공들인 흔적은 시간의 더께를 더하면서 되레 더 살아났다. 동행했던 동아대 건축학과 김기수 교수는 "건물 곳곳에서 나타나는 화려한 장식은 당시 일본인 특유의 미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는데, 기둥과 초석, 2층 난간 나무에 새겨진 정밀한 가공, 창호 형태와 살 짜임의 정교함, 대문 문짝에 동판을 붙여 고급스럽게 치장한 것 등은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 고급 주택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덧붙여 "태평양 전쟁 당시 물자가 귀한 상황에서 이런 건물을 지었다는 것은 이 건물 소유주가 당시 엄청난 재력가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했다.

이 건물은 이후 수차례 주인과 쓰임새가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2010년 12월 문화재청이 인수했다. 지난해 4월부터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위탁 관리하고 있다.


안방 화장실·탁 트인 전망
구석구석 화려한 일본풍 양식
요즘 고급주택에도 견줄 만

세월 따라 시나브로 훼손
마구잡이 보수도 심각
'생활 변천사' 유산 지켜내야



■ 섬세하고 화려한 장식 자랑

정란각에서 초량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면 직선거리로 불과 1㎞ 남짓한 곳에 또 다른 일본식 고급 주택이 있다. 일본영사관 뒤편 구릉부에 자리잡은 다나카 주택(초량동 일식가옥)이다.

이 주택은 1925년 당시 토목업에 종사했던 일본인 다나카(田中筆吉)에 의해 1층 규모의 목조 일식 주택으로 건립됐다고 전한다. 이후 1931년 북서쪽 부지에 2층 규모의 목조 일식주택을, 해방 이후에는 최초 부지의 남측 부지에 2층 규모의 철근 콘크리트조와 일부 블록조 주택이 증축돼, 오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단층목조 건물 1동과 2층 목조 건물 1동, 2층 양옥건물 1동 등 모두 3개 동의 건물이 하나로 연결된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중 단층 일식 목조 건물은 일식 평기와 지붕과 창문, 다다미 등 일식 주거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부엌 북쪽으로는 또 하나의 방이 있는데, 이곳은 집안일을 돕는 가정부의 거주 공간으로 추정된다.

2층 목조건물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각 방에서 복도로 연결하는 문. 나무로 문틀과 창살을 만들고 종이를 붙였으며, 가운데 장식 유리를 넣은 것이 특징이다. 1층 응접실은 일본식 주택과 양식 주택이 혼합한 형태로 근대 일본 주택에서 나타나는 입식 생활 공간을 제대로 보여준다. 외부를 향한 2층 창호 부분은 장식이 아름답다. 창틀, 창살 하나까지 섬세하고 화려한 문양을 새겨, 정성이 느껴진다. 동판으로 마감된 창문틀에 장식적 요소의 철창도 붙어 있다. 이는 건물 외벽 담장도 마찬가지다. 담장의 패턴과 재질이 3가지 형태로 나누어져 있다. 가장 아래쪽엔 거친 마감을 사용하다 점점 위쪽으로 갈수록 민무늬를 형성하고 있다.

김 교수는 "2층 목조 건물의 기둥과 초석, 연목, 2층 난간의 정밀한 가공, 창호 형태의 정교한 짜임, 장식용 환기창(란마·란間), 동판을 접어 기둥을 장식한 것 등은 당시 국내 일반 주택에서 보기 힘든 것들이다"고 설명했다.

바깥 정원 역시 자연을 집안으로 가져온 일식 정원의 전형을 보여준다.



■ 어떻게 보존하고 관리해야 하나

'정란각'이나 '다나카' 주택처럼 일본식 주택을 보여주는 주택들이 부산 지역 곳곳에 제법 산재해 있다. 그중에서는 권호성(부산 동래구 온천동) 가옥은 부산지역에서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서양풍 일식 주택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안강태(부산 서구 초장동) 가옥은 실내장식, 재료 면에서 한식가옥의 요소를 일부 채용해 지은 일식 목조주택으로 근대 우리나라 주거건축의 변천 과정과 생활사, 향토사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 가치 있는 근대 문화유산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들어 근대 건축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선 일제 강점기 때 지어졌던 주택이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따라서 일식 주택을 비롯한 근대 건축에 대한 좀 더 치밀한 실태조사와 기록 보존, 활용방안은 반드시 수립돼야 한다.

김 교수는 "시나브로 사라지는 것도 문제지만 보존도 문제다. 기존에 있는 집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많이 훼손되고 있고, 이에 대한 보수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보수가 되어야 하는데 전문가 의견도 없이 마구잡이로 진행되는 일도 있어 그게 더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정달식 기자 dosol@busan.com
부산일보, 동아대 건축학과 역사이론연구실, 도시건축재생연구소 '건전지'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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