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람 쌩쌩 부는 날 문득 여름이 그리워졌다. 눈부신 햇살, 출렁이는 파도, 뜨거운 열정이 넘실대는 계절을 찾아 필리핀으로 떠났다. 필리핀은 7천107개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이다. 크게 루손·비사얀·민다나오 지역으로 나뉘는데, 한적한 겨울의 여름 여행을 즐기고자 한다면 비사얀 지역 세부 옆에 있는 보홀이 제격이다.
# 바다와 초록에 빠지다
보홀 여행의 시작은 바다다. 숙소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일찍 해안가로 나섰다. 수심이 얕아 작은 배까지 걸어가다 보니 무릎까지 물에 잠긴다. 해변에서는 반바지가 필수다. 작은 배에서 방카보트로 옮겨 탄다. 오전 6시 이른 출항의 이유는 돌고래 투어 때문이다. 아침에 움직임이 많다는 돌고래를 찾아 파밀라칸 섬 앞바다로 갔다. 남국의 해가 수면을 데우기 시작하자 멀리 파도가 요동치는 것이 보인다. "돌고래다" 하는 외침과 함께 배 위에서 환호성이 터진다. 자연 속의 돌고래를 가까이서 본다는 것은 어른들에게도 설레는 일이다.
가까이 왔던 돌고래 무리가 사라지면 배도 따라 이동한다. 돌고래와 배의 숨바꼭질이 수차례 거듭된 후 옆으로 다가오던 한 녀석이 물 위로 뛰어올라 휘리릭~ 멋진 회전 묘기를 선보인다. '스핀돌고래'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한 셈이다. 다른 돌고래보다 몸집이 작아서 회전이 더 가볍게 느껴진다.
돌고래가 멀리 사라지면 배는 돌고래 투어 기지가 있는 파밀라칸 섬으로 향한다. 섬 가까이 갈수록 물색이 영롱한 에메랄드빛으로 변한다. 해변의 모래는 하얗게 빛난다. 파밀라칸이라는 섬 이름은 '고래잡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포경 금지 이후 섬 사람들은 돌고래·고래 관람으로 생업의 방향을 틀었다. 한때 이 아름다운 해변이 고래 피로 붉게 물들었다는 게 상상이 안 된다.
때마침 섬에 도착한 날이 수요일. 보홀 바클라욘에 장이 서는 날이다. 섬 사람들도 시장에 갈 준비를 한다. 바클라욘 선착장 앞에 위치한 공용시장이 꽤 크다. 의류, 수공예품, 각종 채소에 고기·생선 등 다양한 물건이 판매된다. 여러 종류의 말린 생선이 눈에 들어온다. 현지인들이 굽거나 튀겨 식탁에 올린다는데 한국식 마른 멸치 비슷한 것도 있다.
시장 옆 바클라욘 교회(성모마리아성당)로 이동했다. 1727년에 건립된 이 성당은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교회 중 한 곳이다. 성당 제일 앞줄에서 고위 관료에게만 '착석'을 허용했던 의자가 이제는 양 옆에 놓여 모든 이를 맞게 된 것이 변화라면 변화일까.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한 성당은 낡았지만 고즈넉한 멋이 있다.
이제 초록을 보러갈 시간. 총 길이 21㎞에 달하는 로복 강은 수목이 울창해 크루즈를 하기에 좋다. 선상에서 식사를 하고 투어를 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점심이나 저녁시간에 이용하면 편리하다. '음악의 마을'이라 불리는 로복 출신의 음악가가 같이 탑승해 생음악으로 분위기를 돋운다.
본격적인 초록을 즐기려면 초콜릿힐로 간다. 200만 년 전 얕은 바다 속에 있던 보홀의 지면이 솟아올랐다. 이때 산호층이 엷어지며 '키세스 초콜릿'과 같은 모양의 봉우리가 되었다고 한다. 총 1천268개의 초록 봉우리가 있는데 건기가 끝날 무렵에는 진한 갈색으로 변해 진짜 초콜릿처럼 보인다. 그런 이유 때문에 초콜릿을 집어 드는 자세로 기념촬영을 하는 이들이 많다.
초콜릿힐에 얽힌 여러 전설 중 하나가 거인 아로고 이야기다. 아로고가 인간 여자 알루야를 사랑하게 됐다. 그는 다른 사람과의 결혼을 앞둔 알루야를 납치할 계획을 세웠고 공포를 느낀 알루야는 급사했다. 아로고는 자신의 죄를 탓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이 눈물이 떨어져 봉우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초콜릿힐 전망대로 올라가는 계단의 숫자가 214개.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 맞췄다. '사랑'에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거인의 흔적을 뒤로 하고 '꼬마 포유류'를 만나러 갔다. 몸길이 10여㎝, 그보다 긴 꼬리에 목을 180도 회전할 수 있는 안경원숭이가 바로 그 주인공. 코렐라 마을 야생동물보호구역 내 자연 거주지에서 만난 이 '눈만 큰 원숭이'는 진짜 작았다. 너무 몸집이 작아 안경원숭이 앞에서는 저절로 속삭이게 됐다. 비 때문에 다섯 마리 정도만 나와 있었는데 안내원은 아기 안경원숭이도 볼 수 있어 운이 좋은 날이라고 했다. 그러나 작은 엄마가 더 작은 아기를 너무 꼭 껴안고 있어 꼼지락거리는 발가락만 볼 수 있었다.
# 젊음과 변화를 느끼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는 대도시의 화려함과 변천의 역사를 함께 보여준다. 메트로마닐라는 총 17개의 도시·자치구로 구성돼 있다. 이 중 마닐라시티와 마카티가 도시 관광의 중심이 된다.
마닐라시티에는 필리핀의 독립 영웅 호세 리잘을 추모해 만든 리잘 공원과 스페인 점령기 유적이 남아있는 인트라무로스가 있다. '성 안쪽'이라는 뜻의 인트라무로스에는 산티아고 요새, 오거스틴 성당과 박물관 등이 있다. 산티아고 요새에서는 호세 리잘의 마지막 발걸음 등 그와 관련된 다양한 유적도 볼 수 있다.
쇼핑을 원한다면 몰오브아시아(Mall of Asia)가 좋다. 마닐라를 몰오브아시아가 있기 전과 후로 나눈다고 할 만큼 큰 쇼핑몰이다. 크기만으로는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이다. 최근에는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 인근에 호텔·쇼핑센터·카지노·공연장을 한 곳에 모은 리조트월드마닐라가 문을 열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여름 도시의 밤을 느끼려면 신흥 상업지구인 마카티로 가자. 멋진 레스토랑과 카페, 클럽들이 여행자를 기다린다. 건물 안이 갑갑하다면 보니파시오 하이 스트리트로 가서 노천 카페의 여유를 즐길 수도 있다. 흥겹게 들썩이는 도시의 열기는 겨울 나라로 돌아올 당신에게 또 하나의 여름 추억을 선사할 것이다.
필리핀 보홀=글·사진·영상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취재협조=세부퍼시픽항공·필리핀관광청
찾아가는 길

부산에서 필리핀은 생각보다 가깝다. 비행기로 3시간 35분이면 따뜻한 여름 나라에 도착한다. 지난 6월 저가항공사인 세부퍼시픽항공이 부산~마닐라 구간을 주 4회(월·수·금·토) 신규 취항하면서 접근성이 더 좋아졌다. 마닐라~보홀 구간은 세부퍼시픽항공이 매일 2편씩 운항하고 있다. 보홀·세부를 여행하고 싶다면 부산~세부 직항편을 이용하면 된다. 세부에서 보홀까지는 페리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051-462-0686. 오금아 기자
영상편집: 이동민 대학생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