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푼 부산 설화] 24. 아버지의 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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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 막으려 황금빛 샘 에 물을 채우는 아버지

그림=서양화가 박경효

# 금샘 전설 / 부산 금정구 금정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산마루에 3장(丈)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자(尺)이며, 깊이는 7치(寸)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고 빛은 황금색이다. 전하는 말로는 금빛 물고기(梵魚)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고 한다. 신라 문무왕 때 왜구들의 침범이 극심했다. 심지어 왜인들은 동해 남부해안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짓기도 하고 왜구들과 결탁하여 온갖 노략질을 일삼았다. 문무왕은 퇴치 방안을 아무리 생각해도 묘책이 서지 않았다. 하루는 꿈에 천지신명이 나타나, "대왕의 백성사랑이 지극하시니, 내 방도를 알려 드리오다. 태백산중의 의상대사를 맞이하여 친히 함께 금정산(金井山)으로 가시어 금샘 밑에서 칠일 밤낮으로 화엄신중을 독송하시오. 그 정성에 따라 미륵여래가 금색신으로 화현하고 사방의 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색신으로, 비로자나 여래가 금색신으로 화현할 것입니다. 비로자나 여래가 보현, 문수, 향화동자 등 40법체를 거느리고 동해를 위압하게 되어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문무왕은 의상대사와 금정산 금샘으로 들어가 칠일 밤샘기도를 드렸다. 의상대사는 "대왕과 빈도(貧道)의 지극정성으로 왜구들은 물러가겠지만, 만약 후대에 왜적이 또 침입할 수 있습니다. 왜적의 침입을 미리 막기 위해 금정산에 절을 지어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일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진언을 드리자 문무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하늘에서 오색구름을 타고 금샘에 내려와 놀았다는 금빛 물고기는 바로 우주 만물의 창조신으로서 사바세계를 주재(主宰)하고 불교의 보호신으로서 불교도의 존숭을 받고 있는 범천왕(梵天王=Brahmadeva)이 사는 세계에서 내려온 범어(梵魚)다. 범어는 신성어족의 계열로 범어가 내려와 논 장소는 성역(聖域) 중의 성소(聖所)다. 자료제공=김승찬 부산대 명예교수



샛노란 아침 햇살이

샘 속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언뜻 출렁이는 물 속에

정말 금빛 물고기가

헤엄치는 듯 보인다

아니 정말 금고기 아냐!



꼭두새벽, 아버지를 따라 산꼭대기에 올랐다. 무슨 소원이 있어 산신령님에게 빌 것도 아니고, 산삼을 캐러 가는 것도 아니다. 누가 시킨 짓은 더욱 아니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라더니, 꼭 무슨 귀신에 씌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믿기 어렵겠지만, 엄마 말을 빌리면 산도깨비에게 홀렸단다. 산도깨비에게 홀린 사람은 내가 아니고 아버지다. 돈키호테 같은 우리 아버지. 보통 때는 늘 혼자 산에 다니더니 이번엔 물귀신같이 날 잡고 늘어졌다.

"인마, 니는 내 편 아이가? 같이 가자. 엉? 이 애비가 산에서 꼭 할 말이 있다 안 하나, 아주 중요한 일이다카이."

말이라면 아무 데서나 하면 될 것이지, 꼭 산에서 해야 할 건 뭐고? 아버지의 뜻밖의 성화가 귀찮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의 주문대로 독도경비대 의무경찰을 지원해 입대를 앞두고 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당분간 떨어져 있을 아버지 소원을 들어주자, 라고 큰마음 먹고 따라나섰다.

초등학교 다닐 땐 한두 번 아버지를 따라 금정산에 간 적이 있다. 철없는 나에게 역사가 어떻고 금샘이 어떻고 하는 아버지 말을 난 건성으로 들었다. 오늘도 아마 아버지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늘어놓을 것이 뻔했다. 말이야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면 그만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아버지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아버지는 큰 물통을 지고 팔백 고지 금정산 꼭대기 금샘에 물을 붓는 일을 한다. 아주 고된 작업이다. 어디에서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다. 시간만 나면 물통을 지고 불문곡직 금정산에 올라간다. 다른 사람들은 산에서 약수를 길어다가 집으로 가져오는데 아버지는 반대다. 그러니 누가 제정신이라 하겠나. 엄마는 산도깨비가 씌었다고 치부해버린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지청구도 끝이 없었다.

"지 애비도 맨날 천날 닭방구 타령이더니…, 산만디에 방구를 올려놓는 서양구신은 들어봐도, 물을 지고 산에 올라간다는 이바구는 듣도 보도 못했다. 산불이 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저놈이 미쳤지."

조금 수긍이 가는 부분도 없지 않다. 꼭 일본에서 역사가 어떻다든지, 독도를 자기네 거라든지 하는 소리가 들리면 할아버지는 입에 거품을 물었고, 아버지는 한술 더 떠 물을 지고 산으로 올라갔다. 이번 일본 국회의원이 울릉도를 방문하겠다는 소식이 온 나라를 들쑤셔놓자 아버지는 다시 물통을 진 것이다.



칠흑 같은 시간, 범어사 뒤길 너덜겅은 으스스한 게 무섭기가 그지없다. 금방이라도 숲 속에서 뭔가 툭 튀어나올 것만 같다. 앞서 가는 아버지의 손전등 불빛만 보고 정신없이 걸었다. 숨이 목에 차 꼭 죽는 줄 알았다.

북문을 지나자, 이것이 부처님의 자비일까, 어디선가 어둠을 깨는 목탁소리가 들려와 무섬증은 거짓말 같이 싹 달아나고 세심정(洗心井) 약수터가 나온다. 그때까지 말이 없던 아버지는 약수터 앞에 쪼그려 앉으며 입을 열었다.

"아들아, 금정산의 아침은 말이야, 저쪽 계명봉에서 장닭이 홰를 치면서 열리는 기라."

나는 물을 마시다 말고 동쪽 봉우리를 쳐다보았다. 아직 덜 깬 듯한 하늘에 산마루들이 희미한 금을 긋기 시작하는데, 금방이라도 닭 우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야, 금정산의 아침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내가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아버지는 큰 통에 가득 물을 받아, 나를 힐긋힐긋 보면서 앞선다. 물통을 진 아버지의 모습이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팔팔하다. 이내 날이 밝아왔다. 허공 가득한 햇살을 보자 가슴이 탁 트이고 상쾌하다. 꼭 가을 소풍 온 기분이다.

능선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금샘이 나온다. 어렸을 때 몇 차례 와 본 곳이었다. 철이 든 탓일까? 오늘은 왠지 금샘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아버지가 홀린 것일까? 나는 금샘 안내판 앞에 선다. 바위 꼭대기 황금빛 우물에 금빛 물고기(梵魚)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적혀 있다. 그럼, 아버지가 금빛 물고기를 잡으러 온 거야? 아니지, 물을 지고 왔으니, 어항에 물을 갈듯 새 물로 갈아주려는 것이겠군. 좌우지간 돈키호테 같은 아버지야.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웃음이 절로 나온다.

로프를 잡고 금샘으로 올라간다. 집채만 한 바위 위쪽에 과연 샘이 있었다. 물이 솟아나는 샘은 아니고 빗물이 고인 샘이다. 샛노란 아침 햇살이 샘 속으로 막 쏟아지고 있었다. 한순간 바람이 일었다. 언뜻 출렁이는 물속에 정말 금빛 물고기가 헤엄치는 듯이 보인다. 아니, 정말 금고기 아냐! 나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릅뜬다. 자세히 보니 하늘에 뜬 한 조각 구름이 반사된 것이다. 야! 이거 헷갈린다. 이제 나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고 진짜 금고기를 본 듯 기분이 야릇하다. 아버지는 금샘바위를 도자기 보듯이 꼼꼼히 둘러보고는 무겁게 지고 온 물을 무슨 엄숙한 의식이라도 하듯 조심조심 붓는다.

"아버지, 이 속에 진짜 금고기가 있어요?"

"뭐……물이 맑고 정성을 드리면 금고기가 내려온다는 얘기지."

"금고기가 내려오면 뭐하게요. 잡으려고요?"

내가 핀잔을 주듯 장단을 맞추자, 아버지는 멋쩍은지 웃으며 허리를 편다.

"인마, 그건 그저 하는 이바구고…, 그냥 정성을 드리는 거 아이가. 운동 삼아 정성도 드리고…."

"그냥? 운동, 정성요? 아버지가 공무원도 통장 반장도 금정산 산지기도 아닌데…."

"그래, 백지…!"

아버지는 백지라고 말꼬리를 흘리고는 길게 뻗은 금정산성을 바라본다. 한동안 말이 없다. 심하게 아버지를 몰아붙인 것 같아 미안하다.

"아들아! 저길 봐라, 금정산성이다. 저 금정산성이 십칠 킬론데 말이야. 천 년 전 수많은 돌멩이로 조상이 하나하나 정성 드려 쌓은 거다. 왜 산꼭대기에 높은 산성을 쌓았겠노? 일본놈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야. 이 금샘을 지키기 위해 말이야."

아버지는 준비해 간 물통을 두들겨 마지막 한 방울까지 금샘에 쏟아 부었다. 아버지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여기뿐만 아니고 온 천지에서 난리가 안 났겠나. 우리는 아무 준비를 안 하고 있다가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안 됐나. 일본놈들은 꼭 자기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우리나라를 침략한다 말이야. 풍신수길이가 말로는 명나라를 친다고 하고 우리나라를 쳐들어왔다 했지만, 사실은 제 나라 민심 수습하고 자기네들끼리 뭉치기 위해서 일으킨 짓이다. 만만한 게 뭐라고. 우릴 만만히 본 짓 아이가."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바위 끝에 선 아버지의 실루엣이 아주 크게 보인다. 목소리는 약간 떨렸지만, 기백이 느껴진다.

"저기 저 봉우리가 계명봉이라고 하는데, 저기에는 암탉 바위라고 하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말이야…."

나는 아버지가 가리키는 대로 멀찌감치 떨어진 청회색 산봉우리로 시선을 돌렸다.

"바위가……안 보이는데요?"

"옛날에 암탉 모양의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일본놈들이 깨어 없앴지. 그리고 그 자리에 무차빼이로 쇠꼬챙이를 박았지. 그 덕에 우리나라 침략에 성공했다는 이바구가 있는 기라. 왜놈들이 천 년 동안 우리나라를 공격해도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 암탉 바위 때문이라고 생각했제. 계명봉 꼭대기에 올라 일본 쪽을 보면, 대마도는 지네 모양을 하고 있다. 지네를 잡아 묵는 기 바로 닭 아이가. 니 할배한태 나도 들은 이바구다."

"아버지, 일본이 우리나라를 천 년 동안이나 침략을 했어요?"

"민비, 아니, 명성황후를 죽인 것도 일본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라고 니 할배가 말하더라. 일본놈들은 가만히 놓아두면 못하는 짓이 없다 말이야. 암탉 바위도 때려 뿌수고 명성황후를 죽인 놈들인데…. 니 관동대지진이라고 들어봤제?"

아침 햇살을 등지고 앉은 아버지의 실루엣이 내 눈에는 꼭 가부좌를 튼 도사 같다. 늘 어깨 처진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귀를 기울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은 나라 아이가. 대지진이 발생하고 폭동이 일어나자, 조센징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도둑질을 했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우익단체들이 앞장서고 정부의 묵인하에 재일교포 수천 명을 죽창이나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지진으로 어수선한 일본 민심을 잠재우고 자기네들끼리 뭉치기 위해서 말이야."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던지 아버지는 다시 사자후를 토한다.

"아들아, 이번에 일본 보수우익 의원들이 울릉도를 방문하겠다는 것은 기가 맥힐 일 아이가? 게다가 정부가 나서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방위백선가 뭔가를 발표한단다. 교과서에다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적어서 가르치는 건, 도둑놈 심보를 대대로 물려주겠다는 거 아이가? 대지진과 원전사고라는 국난을 맞아 민심이 혼란해지니까 또 우리나라로 화살을 돌려 자기네들끼리 화합을 도모하겠다, 이거 아니겠나."

아버지는 말을 끊고 가래침을 탁 뱉어내었다.

"그 사람들 미친 짓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고, 앞으로도 계속 될끼다. 나는 그 사람들이 불쌍타. 반성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남의 나라 전설 바위도 때려 뿌수는 놈들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나. 니가 독도경비대로 간다카이 생각나서 하는 소리다."

독도경비대. 문득 그 말이 비장하게 들린다. 독도엔 아직 진정한 해방이 오지 않은 것인가.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내 생에 처음으로 어떤 의미가 부여된 것 같아 가슴 뿌듯했다.

"돌아가신 니 할배는 말이야, 부산의 중심엔 금샘이 있고, 대일본 방어의 근본은 금샘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니도 한번 생각해 봐라, 산꼭대기에 이런 샘이 있다는 게 신기하제?"

한동안 쓰다듬 듯한 눈길로 금샘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빈 물통을 들고 터덜터덜 내려간다. 해는 중천에 떠오르고 멀리 바다 건너 대마도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부산일보사 ·부산소설가협회 ·하나은행 공동기획


신선 소설가

◇약력=201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단편 소설 '봄꿈' '경칩' '금고기야, 금고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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