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 ] 서진 강선제, 생활문화인 이 부부가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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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집이라는 큰길 벗어나면 인생엔 재미난 샛길 아주 많아요

'날자. 날자꾸나.' 매일 산책하는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강선제와 서진은 두 손 꼭 잡고 자유롭게 날았다. 김병집 기자 bjk@

■불친절한 가게

문 닫혀 있는 시간이 더 많은데, 안내문 하나 없다. 가게 주인은 신경 안 쓰는 분위기다. 죽자 사자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너무 한 거 아냐? 광안리 해변 앞 '족발'이란 가게. "일이 많으면 문을 못 열어요. 오늘도 새벽 6시까지 밤을 꼴딱 새우면서 일했어요. 문은 열고 싶을 때 열어요." 커다란 뿔테안경 너머로 살짝 미소 짓던 강선제(36)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6평 남짓한 가게엔 외국여행에서 사왔다는 옷과 꼬물꼬물 만들었다는 액세서리가 오랜만에 일광욕의 호사를 누린다.

"원래 족발집이었는데, 간판은 그대로 뒀어요. 단골손님 중 절반은 외국인이에요. 산책하다 문이 열려 있으면 '어! 문 열었네' 하면서 들어와서 사 가는 거죠." 화려한 꽃무늬의 하와이풍 셔츠를 입은 서진(36)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다. 이내 문을 닫더니 둘은 팔짱 끼고 여유롭게 광안리 해변 산책을 시작한다. 부산대 앞에서 3년 동안 '재미난 복수'란 거리 축제를 기획했던 강선제와 남편 서진의 삶은 그 자체가 '재미난 복수'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에 나오는 '비뚤한 세상에 복수하는 길은 스스로 재미있게 노는 것'이란 말에 걸맞게 사는 부부다.

고교 때부터 문학 감수성 예민했던 아내
풍물·연극·야학이 있어 풍성했던 청춘…
수재에 모범생 딱지 붙이고 살던 남편
공학 박사과정 밟다 인생진로 확 바꿔…
아내가 내는 잡지 '보일라'서 운명적 만남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결혼식

2009년 11월 8일 오후 1시.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먹구름이 광안대교 주탑까지 낮게 내려앉은 날이었다. 멀쩡한 결혼식장 놔두고 백사장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못난 자식이라고 혀를 끌끌 차던 양가 부모도 세찬 바람과 곧 몰아칠 비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거센 바람에 초례상이 날아갈 뻔해서 누군가가 상을 꼭 붙잡고 있어야 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억수 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양가 부모님은 비 맞지 않고 식을 끝냈다는 상황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는 분위기였다.

7년 넘게 사귄 오래된 연인은 남들처럼 굳이 돈 써가며 결혼식을 올리고 싶지 않았다. "매일 산책하는 광안리 바다에서 결혼식을 하면 좋겠다." 파티플래너에게 자문했더니 "미쳤다"는 답이 돌아왔다. 친구들 도움으로 전통혼례를 치렀다. "결혼은 지금껏 키워주신 덕분에 독립된 가정을 꾸리게 됐다고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는 일인데, 보통은 부모님의 마지막 등골까지 빼먹는 일이 돼 버렸어요." 축의금을 공식적으로 받진 않았지만, 양가 부모님께 꽤 많은 돈을 드릴 수 있었다.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한낮에도 기타를 치는 여유를 가진다는 건 남들이 추구하는 많은 부분을 버렸기에 가능했다.


■'날라리' 강선제

아내: 강선제
나이: 36세
광안리해변 앞 '족발' 옷가게 운영
문화잡지 보일라의 발행인 겸 편집장

"'죽은 시인의 사회' 봤니?" 앞자리에 앉은 그 아이는 스무 번 넘게 봤다고 했다. 여고생 7명이 작당해 영화처럼 '죽은 시인의 사회'란 모임을 만들었다. 민중가요를 부르고, 신문 사설로 토론하고, 시를 썼다. 이제야 밝히는 일이지만, 버너와 코펠을 가져오고 교실 커튼을 뜯어 학교 옥상에서 '자체 야영'도 더러 했다. 부산서 하는 연극이란 연극은 죄다 보고, 수능 보름 전에도 비둘기호 타고 서울에 올라가 미술관을 찾았다.

토요일엔 '어울리지'란 연극 모임을 하면서 1년에 창작극 두 편을 올리고, 일요일엔 동아대 하단캠퍼스 뒤 벙커에서 몇 시간씩 풍물을 치다 오느라 공부할 짬이 안 났다. 세상이 여고생에게 금지한 것들만 골라서 했고, 여고생이 할 수 있는 애먼 짓은 다 했다. 영민했고, 감수성이 극에 달했던 여고 시절이었다.

부산외대 태국어과를 잘 다니다가 부산대 미대에 다시 시험을 쳤다. '공주' 천지였던 학과에서 그녀는 이내 눈에 띄었다. 철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미대에 들어와 동기가 된 언니의 권유로 야학에 빠졌다. 한 달 동안 중국 여행하고 왔다고 선배들이 한문 수업을 맡겼다. "일에서 열까지 밖에 쓸 줄 모르는데, 머리 희끗희끗한 어르신들 앞에서 어떻게 한문을 가르치지?" 땀 뻘뻘 흘리며 3시간 공부해 1시간 가르쳤다. 진지하게 공부란 걸 해본 유일한 경험이었다.

"살면서 꼭 해봐야 하는 세 가지는 풍물, 연극, 야학이에요. 풍물은 타악기의 어울림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해요. 누구나 한 번은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존재감을 느껴 봐야 합니다. 야학은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고, 타인을 돌아볼 계기가 되죠. 이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청춘은 풍성했어요." 세상을 바꾸는 건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문화예술을 통한 교감이란 사실까지 덤으로 깨달았다.


■'모범생' 서진

남편: 서진
나이: 36세
매일 글 쓰는 남자
한 페이지 단편소설 운영자

부산대 전자공학과 박사 과정 2학기를 마치고, 돌연 학교를 그만두기 전까지 서진의 이마엔 늘 '모·범·생'이란 딱지가 붙어 있었다. 고등학교 때 전교 1~2등도 몇 번 해본 내신 1등급이었다. 컴퓨터 음악에 빠졌던 경험이 그나마 내세울 만한 외도였다.

사촌 형이 컴퓨터 가게를 개업하면서 산 컴퓨터가 유일한 놀잇거리였다. PC 통신이 유행하던 시절, 컴퓨터 음악 동호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일탈의 선은 넘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하이텔이 주최한 전국 인터넷 음악 경진대회에서 2등을 했고, KT에서 연 홈페이지 경연대회에서도 2등을 했다. 대학원 다니면서 좋은 글을 모아서 이메일로 보내주는 '해피레터'란 사이트를 운영했다. 2만 명에 달하는 구독자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단체 메일을 보냈는데, 그래도 세상은 따분했다.

박사 과정을 밟던 중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2년 동안의 미국 여행에서 경험한 다른 세상의 충격은 모범생의 진로를 확 바꿔놓았다. 박사 과정까지 쭉쭉 올라왔지만, 목숨 걸고 하고 싶은 일인지에 대한 회의도 몰려왔다.


■보일라

미국을 여행하던 서진은 2002년 짧은 소설 한 편을 '보일라'란 잡지에 투고했다. 2002년 10월 보일라 4호에 소설을 투고한 서진은 놀러 오라는 편집장의 꾐에 빠져 비가 새는 반지하 사무실로 발걸음을 뗐다. '모범생'과 '날라리'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보일라는 2002년 6월에 강선제가 창간한 독립문화잡지다. 보일라는 신진 작가를 주로 소개한다.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교수님이 그 친구의 작품을 훔쳐 개인전에 냈대요. 부산대 홈페이지 게시판에 사건을 폭로했어요. 사과는커녕 평소 학업태도가 불량한 학생으로 몰아가며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단 말만 들었어요. 지역 젊은 작가의 상황이 열악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강선제가 보일라의 초점을 젊은 예술가 지원으로 잡은 배경이다. 독립하되 고립되지 않기, 원치 않은 곳에 불려다니지 않기, 반하지 않았다면 취재하지 말기, 현장에서 멀어지지 않기, 그때그때 바꿀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지기. 이런 것들이 보일라가 10년 가까이 버티는 힘이다. 하나 더 있다. "절실하게 돈이 필요했던 때가 보일라 발행비를 마련해야 할 때였어요. 한 달에 얼마를 벌든 무조건 보일라에 투자했어요. 돈을 좀 더 벌면 보일라 더 찍었어요. 번 돈을 모았으면 아버지 사업 파산도 막았을 테지요."

보일라를 하는 9년 동안 미술 시장은 엄청나게 변했다. 젊은 작가들도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 없이 능력껏 인정받으면서 활동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야학을 하면서 이 시대에 과연 야학이 필요한지 고민했던 것처럼 이 시대에 보일라가 필요한지 고민해요.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작가들이 소비되는 시대가 됐지만, 여전히 소개해야 할 작가는 많아요."

최근 보일라 89호가 나왔고, 90호를 만드는 중이다. 보일라는 매달 5천 부가량 찍지만, 정해진 건 아니다. 자금이 넉넉할 땐 5만 부를 내기도 했다. "거창하게 문화운동이나 신념으로 이야기되는 건 싫어요. 크게 의미부여 하거나 강요하는 것도 싫어요. 가볍게 해야 오래 할 것 같기도 하고요."

한 페이지 단편소설 사이트도 운영  
회원만 8천 명 소설 9천여 편 '접속' 
책으로도 인쇄 회원·후원자에 보내줘
"취미로 시작한 일 네티즌 호응 높아 
글쓰기 즐거움 알았다는 사람 보며 뿌듯"

■한 페이지 단편소설(한단설)

서진은 2년 남짓한 미국 여행 이후 2004년부터 매년 두세 달간 여행을 떠났다. 뉴욕은 가장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좁은 공간에 밀집된 재미난 곳이었다. 지하철 정액권을 마음껏 쓰면서 뉴욕을 돌아다녔다. 100년 넘은 뉴욕 지하철엔 지상에서 도망치거나 버림받은 실패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려다 실패한 남자의 이야기를 더해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란 장편소설을 써, 한겨레 문학상을 받았다. 세 번째 소설이었다. 2010년엔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란 에세이를 썼고, 올해 '하트 브레이크 호텔'이란 연작소설집을 낼 작정이다.

소설가로서의 일상 말고 하는 일이 또 있다. A4 한 장 분량의 소설로 습작하던 2003년, 보일라에 광고를 내 '한 페이지 단편소설' 투고를 받았다. 단편소설 분량이라면 버겁지만, A4 한 장 분량이라면 도전할 사람이 많지 않을까 했다.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8천 명가량의 회원이 9천900편이 넘는 이야기를 올렸다. 그중 지금까지 816편의 소설을 뽑았다. 선정작 100편이 모이면 책을 내겠다고 약속했고, 독립출판의 형식으로 그 약속을 지켰다. 300~500부가량 인쇄해 회원들과 후원자들에게 보내준다.

"처음엔 취미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하루에 1시간 투자해서 다른 이의 창작 욕구를 일깨우는 게 1시간 동안 글을 써서 제 작품의 질을 올리는 것보다 공익적이란 생각을 했어요. '한단설'을 통해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았다는 사람을 만나면 기뻐요."

어깨를 빌려주고 서로 기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들은 그 행복을 매일 만끽한다. 김병집 기자 bjk@

■가지 않은 길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가는 항공권이 40만 원대에 나온 적이 있어요. 보통 120만~130만 원이에요. 죽었다 깨어나도 나오지 않을 가격이라면서 그 자리에서 결정했어요. 그렇게 2009년에 둘이서 처음 미국 여행을 갔어요. 2010년 2월엔 비즈니스 통역으로 돈 벌면서 워싱턴에 갔고요, 지난 2월에는 마일리지가 쌓여서 공짜 표로 하와이에 함께 갔어요. 하와이에선 방 한 칸짜리를 못 구해 두 칸짜리 얻었는데, 방 하나는 임시민박을 쳐서 2천 달러 넘게 벌었어요. 외국인 디자인 고객 중에 돈은 엄청 벌지만, 너무 바쁘게 사는 사람이 있는데, 하와이에 집 구해줄 테니까 게스트하우스든 뭐든 해보래요. 너희 사는 거 보니까 내가 잘못 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말이죠."

여행담이 줄줄 흘러나온다. "집과 차에 대한 집착만 버리면, 여행도 마음대로 다니고, 원하는 걸 충분히 할 수 있는 금전적 여유가 돼요. 차를 사겠다고 시작하면 일 년에 두 번 가는 여행도 못 가고, 하고 싶은 것도 줄여가면서 살아야겠죠."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온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즐겨라)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은유는 이 부부의 삶과 닿아 있다. 안락한 직장, 넓은 집, 좋은 차라는 욕망의 큰길을 벗어나면 선택할 수 있는 재미난 샛길이 너무 많다는 걸 이 영리한 부부는 일찌감치 간파했다. 다른 환경에서 커왔지만 둘이 하나 될 수 있었던 건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그럴듯해 보이는 삶을 사는 것보다 그들 스스로 행복한 것이 효도하는 일이고 남들에게도 본보기가 된다는 생각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광안리 뒷골목 어딘가에서 한낮에도 한가롭게 손잡고 산책하는 이 두 사람을 만날지 모를 일이다.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사진 강선배 기자
 영상 유성주·서병문 대학생 인턴

남편 서진

1975년 부산 출생. 부산대학교 전자공학과 박사과정 중퇴. 문화잡지 보일라 전 편집장(5~34호). 대안출판 프로젝트 '한 페이지 단편소설(1pagestory.com)' 운영자. 소설가. 제12회 한겨레 문학상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 소설과 에세이를 결합한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홈페이지 3nightsonly.com


아내 강선제

1975년 부산 출생.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졸업. 2002년 창간한 문화잡지 보일라의 발행인 겸 편집장. 디자인 보일라와 광안리 해변 앞 옷 가게 '족발' 운영. 세 마리의 고양이와 한 마리의 강아지, 소설가 서진과 함께 삼. 일 년에 두 달, 하루에 두 번, 일주일에 두 번은 약속처럼 여행하고 밥 먹고 사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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