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23. 국제시장 전신, '돗떼기시장'의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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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따'(경매 낙찰을 일컫는 일본말) 상자 안에서 웬 돈다발이… '꿀꺽'

원래 국제시장 일대는 주택지였다. 1945년 8월 1일 지금의 부산일보사와 경남여고 사이에 있던 일본 육군관사가 미B29의 폭격을 받았다. 당황한 일본은 도심 중심가 주거밀집 지역에 대해 대대적인 소개 작업을 벌였다. 해방을 거치면서 지금의 국제시장 공터에 노점이 형성됐고,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규모 시장으로 발전했다. 1945년 3월 부산 중구 지역 항공사진을 보면 국제시장 일대에 주택이 들어서 있다.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 제공

60년이 훨씬 지난 옛날 일이다. 1945년 8·15 광복을 맞은 그 무렵 부산 시내에 '돗떼기 시장'이란 이름의 시장이 있었다. 오늘날 그것을 알고 있는 시민은 아주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무슨 건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폐허 같은 공터에 장이 들어섰다. 노점상이 판을 쳤다. 물건 가지는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값진 것이 많아서 꽤 흥청댔다.

美 공습 대비 철거부지 해방 후 노점상 즐비
日 압수 보따리서 헌책 노다지 쏟아져 '횡재'


그 '돗떼기시장' 또는 '도떼기시장'이 오늘날 국제시장의 전신이다. 그 빈터에 차츰 건물이 들어서고 규모가 잡히면서 지금 부산의 가장 규모가 큰 시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돗떼기 시장'이 있었다는 것은 거짓말 같다.

일본강점기 말기,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이 기울기 시작할 무렵, '사카에 마치'(지금의 신창동 4가 일대)에서 몽땅 건물이며 집들이 철거됐다. 그것은 '소카이'라고 했는데, 한자로는 소개(疏開)라고 쓴다.

일본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밀리기 시작하면서, 일본 본토가 미군 공습으로 쑥밭이 되어 갔다. 그런 중에 부산에도 미군 폭격기가 나타나서 '공습경보'가 울리곤 했다.

하지만 언제 또 공습을 당할지 모를 다급한 상황에서, 시가지 일부를 아예 몽땅 뜯어내 폭격에 대비하자고 한 것이 바로 소개다. 폭격으로 불길이 옆 동네인 부평동 1가나 신창동 3가 쪽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비상수단이었던 셈이다.

일본이 전쟁에 패하고 철수한 다음, 그 소개 터의 공간에 난데없이 장이 섰다. 온갖 물건이 노점 장 바닥에 나돌았다.

본국으로 철수하는 일본인들이 부두에서 배에 오르기 전 압수당한 물건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조선에 압제를 가한 나머지, 경제적으로 착취해 얻어 챙긴 것이 일인들의 재산이었을 테니까, 철수하는 그들 봇짐 중 일부가 압수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일인들의 짐 말고도 '얌생이' 물건도 시장에 나돌았다. 오늘날 제6부두와 제7부두에 있는, '적기(赤崎)'의 창고에 보관돼 있던, 온갖 군수물자를 훔쳐내오는 도둑질을 일러 '얌생이질'이라고 했다. 그것은 그 당시 시중에 나도는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그런 물자들을 바닥에 펼쳐 놓고 경매를 하곤 했다. 장사치가 물건을 들거나 가리키면서 값을 부르는 데 따라 사는 사람이 값을 정해 사들이곤 했다. 말하자면 낙찰을 본 것인데, 그럴 때마다 장사치는 '돗따'라고 외쳐댔다.

고리짝이 뚜껑도 열지 않은 채로 경매에 부치기도 했는데, 그 안에서 뜻밖에 돈다발이 나오는 수도 있었다. 경매 받은 사람은 그야말로 크나큰 횡재를 한 셈이 된다.

'돗따'는 일본말이다. '취할 취(取)'가 바로 '돗따'인데, 잡았다, 땄다, 챙겼다 등등으로 취득했다는 뜻이 된다. 경매 현장에서는 낙찰(落札)을 보았다는 의미가 될 테지만, '돗떼기 시장'이란 명칭은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

그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나는 뜻밖에, 공짜로 횡재하다시피 '돗따'를 했다. 경매하기 위해 일본인들에게서 압수한 짐 보따리를 풀면 더러 책이 쏟아져 나왔다. 무더기로 나올 때도 있었다. 일인 일부는 그 경황없는 상황에서 짐 보따리 속에 책을 챙겨 넣은 것이다.

경매 상인은 책을 사정없이 내팽개쳤다. 거기 모여든 경매꾼들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래저래 책들은 버려졌다. 쓰레기 더미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거기서 쓸 만한 참고서, 사전, 교양서적, 문학 작품을 알뜰하게 챙겼다. 일본강점기 말기, 책을 산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던 탓에 책 갖기가 꿈이던 내게 그것은 여간한 행운이 아니었다. 땅바닥에 흩뜨려진 것에서 마음에 들 책만 골라내면서 나는 이게 바로 노적가리 같은 보물이라고 생각했다. 고르고 골라 줄로 묶어 둘러매고 가도 누구 한 사람, 막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나의 '공짜 돗따'였다.

뒤늦게야 장사꾼들이 헌책을 따로 챙겨서 돈 받고 팔게 된 것인데, 그것이 보수동 헌책방 골목의 기원이다. 지금도 그 골목에 들어서면 '돗따'라는 외침이 들려오곤 한다.

돈 주고받고 하면서 책을 사고팔고 하게 되기까지 나의 '공짜 돗따'는 계속됐다. 그것이 훗날 나의 서재가 따로 마련되는 계기가 됐다. 나는 세계문학 지식을 그렇게 쌓아갔다.

공짜로 '돗따' 해서 집으로 가져왔던 그 책들! 돈 한 푼도 물지 않는 탓일까. 수십 권 포개어서 둘러매었는데도 가볍기만 했다. 노다지로 캔 황금 덩어리나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광복이 내게 베푼 커다란 선물이었다.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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