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30년, 롯데 30년 부산의 거인, 그들을 만난다] <17> 움직이는 화약고 공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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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루 위해 공 안 피하고 나가면 도루 '근성의 야구'

움직이는 화약고'란 별명으로 유명했던 공필성이 도루에 성공한 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부산일보 DB

 11년 동안 평균타율 0.248, 홈런은 겨우 41개. 너무 평범한 성적이다. 오히려 조금 처진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를 보고 평범한 선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직 그의 인기는 식지 않고 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부산 사직야구장에 가 보면 여전히 등번호 0이 적힌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적지 않다. 프로야구 사상 전무했던 등번호 0번의 주인공. 바로 롯데 자이언츠의 공필성(44) 수비코치다. 그를 인터뷰하러 가자 첫 마디가 이렇다. "전 정말 취재할 것이 없다니까요."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다. 타율, 출루율, 장타율 등 다양한 지표들이 선수들의 가치를 평가한다. 이런 점만 놓고 보면 공 코치에게는 취재할 내용이 정말 없다. 하지만 이런 재미없는 숫자로만 평가할 수 없는 게 바로 공 코치다. 그는 '야구는 경기장에서 직접 눈으로 봐야 한다'는 불변의 진리를 몸으로 말해준 선수였기 때문이다.


95년 데드볼 22개 당시 신기록
팬들 '20도루-20데드볼' 별명
몸 날리는 수비로 유니폼 엉망


공 코치의 선수 시절 별명은 '움직이는 화약고'였다. 그는 지난 1990년 1차지명으로 롯데에 입단했다. 경성대 시절 한 해 후배 박정태 2군 감독과 함께 맹활약하며 팀을 전국대회 정상으로 이끈 국가대표 내야수였다. 공 코치에 대한 주변과 롯데 갈매기들의 기대는 컸지만 그의 성적은 초라했다. 첫 시즌에 타율 0.232와 홈런 1개를 기록했다. 두 번째 시즌도 타율 0.215로 끝마쳤다. 문제는 타율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오는 어이없는 '알까기'였다. 어떨 때는 몸을 날려 그림같이 공을 잡아내 롯데 갈매기들의 박수를 받는가 싶더니 다음 장면에서는 어이없이 공을 빠뜨렸다. 그래서 얻게된 별명이 '움직이는 화약고'였다. 언제 무슨일이 터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992년 롯데는 한국시리즈에서 두 번째 우승을 했다. 김민호, 김응국, 이종운, 전준호, 박정태까지 모두 다섯 명의 3할 타자를 배출한 롯데의 그해 팀타율은 0.288이었다. 다섯 명의 타자보다 공필성의 활약이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그도 그해 타율 0.286으로 눈에 띄는 성적을 남겼다. 상대투수들이 하위타선에서도 쉬어갈 곳을 찾지 못하도록 하는 지뢰밭이었다.

주전으로 거듭난 공 코치는 다시 '움직이는 화약고'가 됐다. 같은 별명이지만 이제 팬들은 공 코치를 이전처럼 불안하게 보지 않았다. 뭔가 일을 낸다는 기대감으로 그를 바라봤다. 여전히 수비에서는 빈틈이 많았다. 그러나 팬들은 그의 매력에 서서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바로 근성 때문이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피하지도 않는 독함이었다. 안되면 일부러 공을 몸에 맞아서라도 가능성을 만들어주는 선수. 팬들이 기록보다도 더 믿는 선수가 공 코치였다. 
 

롯데 코치로 활동하는 현재 모습.

공 코치의 근성은 프로야구 역사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1995년 이른바 '데드볼(몸에 맞는 공)' 22개를 기록해 당시 신기록을 세운 것. 이 기록은 이후 1999년 박종호(현대 유니콘스·31개)에 의해 깨졌다. 그는 타석에서는 언제나 무릎이 스트라이크 존에 붙을 듯 말 듯한 위치에 섰다. 몸쪽 직구에는 여지없이 몸을 갖다댔다.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공 코치가 공을 맞고 1루로 나가면 투수들의 괴로움은 배가 됐다. 언제든지 2루를 훔칠 수 있는 빠른 발이 있었던 데다 뛰는 시늉을 하면서 상대투수를 괴롭히는 일에 명수였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흔들어대면 상대 투수는 리듬을 잃고 타자에게 집중을 하지 못했다. 빠른 발과 두려움을 모르는 그의 플레이를 보고 팬들은 다시 '20-20 클럽'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20홈런-20도루' 클럽이 아니라 '20도루-20데드볼' 클럽이었다.

공 코치는 기록상으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팀에 가장 큰 도움이 된 선수였다. 언제나 타점보다 득점이 많았다. 프로 통산 타점은 346개였지만 득점은 363개였다. 공 코치 덕분에 동료들은 그만큼 많은 타점을 올릴 수 있었다.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 그는 선수들의 신뢰를 듬뿍 받았다. 1998년에는 팀의 상조회장과 임시주장을 맡았다.

수비에서도 그는 근성 덩어리였다. '핫 코너'라 불리는 3루에서 언제나 몸을 날렸다. 때로는 불규칙 바운드된 공을 글러브가 아닌 몸으로 막아야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또 몸을 날렸다. 공 코치는 "유니폼을 한 시즌에 4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전 유니폼이 너무 빨리 떨어져서 늘 부족했어요"라고 말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날리다 보니 유니폼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은퇴한 공 코치는 2007년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시타자로 나섰다. 시구자는 윤형배 2군 투수코치. 윤 코치가 던진 공을 공 코치는 일부러 몸에 맞았다. 프로야구 사상 첫 몸에 맞는 볼 시구를 보며 팬들은 즐거워했다. 공 코치는 "피할 수 있었지만 안 피했어요. 저는 현역 때도 피한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부산 갈매기들은 롯데 선수들이 주눅 들거나 성의 없는 플레이를 할 때면 공 코치를 떠올린다. 좋은 성적은 아니지만 언제나 덤벼들 기세로 나아가는 그의 근성이 팀에 필요한 DNA이기 때문이다.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1998년 프로야구 소사

■6월 롯데 김용희 감독 사임, 김명성 감독 취임

■롯데, 외국인 선수 지명 및 계약 (1차-펠릭스 호세, 2차-마이클 길포일)

■외국인 선수 최초 MVP 타이론 우즈(OB 베어스)

■삼성, 양준혁 6년 연속 3할 타자 등극

■롯데, 50승4무72패로 8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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