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 문진우 프리랜서 사진가 그가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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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한 발·뜨거운 가슴 "나는 뼛속까지 프리랜서…"

프리랜서가 된 후 외모도 달라졌다. 염색한 파마머리와 콧수염. 누가 봐도 자유직업자답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이번 개인전에 쓸 하야리아 사진들이다.

나는 프리랜서다. 우리말로 자유직업자.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까딱하면 백수 취급 받기

딱 좋다. 다행히 나는 꽤 잘나가는 프리랜서다. '프리랜서 사진가 문진우' 하면 알아준다.

정말이다. 부산에서 열리는 대규모 국제행사는 대부분 내 카메라를 거쳐 기록된다.

그러나 프리랜서의 세계는 냉혹하다. 의뢰인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다음 기회는 없다.

프리랜서의 다른 말은 '프로페셔널(프로)'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사랑한 영업사원

나, 문진우는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팩트(fact·사실)'다. 내가 찍은 사진이 작품이 되느냐 마느냐, 남이 알아주느냐 마느냐는 개의치 않는다. 중요한 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거다. 몸은 고되지만 행복하다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취미로 시작한 사진. 지난 36년 동안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나의 첫 카메라는 캐논 FTb. 어머니가 시집올 때 사온 것이었다. 부산상고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돼서였다. 사진 동아리 선배들이 교실에 들어와 말했다. "카메라 있는 사람 손 들어!" 카메라가 귀했던 70년대였다. 나는 어머니의 카메라 덕분에 사진 동아리에 들 수 있었다.

재밌었다. 사진을 찍고 난 뒤 인화 결과를 기다리는 설렘도 좋았다. 고2 땐 거의 학업을 포기할 정도로 사진에 미쳤다. 실험적 행위도 많이 했다. 얼굴에 잔뜩 낙서를 한 뒤 삼각대를 놓고 자화상을 찍는 식이었다. 청소년기의 갈등과 정체성 혼란을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창작욕이었다.

사진 때문에 목표하던 대학에는 가지 못했다. 사진을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사진을 멀리한 건 기껏해야 한 학기였다. 1학년 2학기 때 결국 사진 동아리를 찾아들었다. 졸업 땐 당시 예술대 학생들이나 하던 졸업전까지 열었다. 내 작품이 35점, 함께 졸업한 ROTC(학군단) 출신 후배 작품이 15점이었다. 2인전 형식이었다.

졸업 후엔 대기업에 들어갔다. 영업 파트에서 4년간 일했다. 대리점 두 곳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적성에 맞지 않았다. 여린 성격의 내가 물건을 많이 팔라고 독촉하고 사람을 관리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힘든 시간을 사진으로 풀며 견뎠다.

인물도 찍고 풍경도 찍었다. 닥치는 대로 찍었다. 각종 사진 콘테스트에도 도전했다. 2년 만에 웬만한 대회 상은 다 받았다. 그러나 아마추어의 사진이었다. 자기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나만의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문제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프리랜서의 세계에 'NO'란 없다
변명도 안 통한다 오직 결과물만이…
의뢰인이 요구하는 그 한 컷을 위해
365일 보이는 족족 찍고 자료 모아



기자로 시위 현장을 누비다

1988년, 회사를 그만뒀다. 집에서 난리가 났다. 어렵게 공채로 들어간 대기업, 월급 잘나오는 회사를 그만두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진을 찍고 싶었다. 지인의 소개로 당시 창간한 지 한 달 된 지역 신문사에 들어갔다. 사진 기자가 된 것이다. 회사가 자리를 잡지 못해 사주가 몇 번이나 바뀌었다. 월급도 쥐꼬리만 했다. 그래도 좋았다.

당시는 정치적으로 과도기라 매일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누볐다. 역사의 현장에 서 있다는 것, 그것을 사진으로 기록한다는 것이 흥분됐다. 그러나 시대는 변해갔다. 대학생들도 더 이상 거리로 나오지 않게 됐다. 일이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 이제는 나만의 사진을 찍자. 신문사에 있는 동안에만 개인전을 세 번 열었다. 1993년 '불감시대'가 첫 전시회였다. 군중 속의 고독, 무표정한 도시인의 얼굴을 렌즈에 담았다. 지금 봐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주제다. 그래서인지 가장 애착이 가는 사진들이다.

신문사 일이 아닌 오롯이 나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 개인전을 연다는 것은 자기 계발의 문제였다. 1999년 다니던 신문사는 결국 문을 닫았다. 하지만 개인 문진우의 사진 찍기는 계속되고 있다. 나만의 작업을 해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자 일을 그만두고 사진작가 김홍희 씨와 '포토갤러리 051'을 열었다. 지금은 사진 전문 갤러리가 많지만, 당시로선 전국적으로도 손꼽힐 만큼 선구적이었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존 카플란 전도 유치했고, 성과도 꽤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힘들었다. 이름이 나면 일도 좀 들어올 줄 알았는데, 현실은 만만치가 않았다. 갤러리 임대료도 계속 올랐다. 더는 세를 올려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김홍희 씨에게 말했다. "털자, 우리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갤러리가 문 닫기 전 새로운 일 한 가지를 맡게 됐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의 공식 기록 일이었다. 기록 사진 담당관으로 채용돼 대회 전 준비 과정부터 사진에 담았다. 대회를 앞두고 공식 촬영단이 구성됐다. 부산의 일인데 다른 지역에 뺏길 수는 없었다. 지역 신문사 데스크 출신 선배들에게 팀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마지막엔 서울 팀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포토 부산'의 이름으로 일을 따냈다.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 측에서도 연락이 왔다. 대구에도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경험을 앞세워 계약을 성사시켰다.


백수에서 프리랜서로

대회는 무사히 마쳤지만, 이번엔 진짜 백수가 됐다. 통장엔 3천만 원이 남아있었다. 우리 가족이 1년은 먹고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젠 어쩌나. 막막했다. 어렵다고 징징거려 봐야 도와줄 사람은 없다. 형편이 안 좋다고 우는 소리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래 봐야 남 보기만 흉하다. 다른 이들이 만나기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돼선 안 된다. 무조건 "난 괜찮다" 하고 다녔다.

하나둘 일감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연히 벡스코 모터쇼 행사 촬영을 맡게 됐다. 홍보팀장이 신문사 동료 출신이라 인연이 됐다. 그러나 운도 실력이다. 같이 일해 보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 사람은 절대 쓰지 않는다. 나는 모터쇼를 기자의 시각으로 기록했다. 행사 사진의 퀄리티(질)를 한층 높여 놓은 것이다.

영업사원서 기자, 관장
그리고 백수생활까지
역정마다 날 키운 건
사진에 대한 열정

10년간 내가 촬영한
국제 행사만 150회

기자들은 기본적으로 대상을 객관적으로 찍는 법을 훈련 받는다.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은 그런 능력이 부족하다. 신문의 경우 한 장의 사진으로 모든 걸 다 이야기해야 한다. 한 지면을 사진으로 채우는 연작 사진의 경우엔 스토리를 구성하는 방법이 있다. 중심이 되는 사진이 있고 이를 받쳐주는 보조 사진이 있다. 한 마디로 사진에도 '야마(언론계에서 기사의 핵심, 주제를 일컫는 말)'가 있어야 한다.

행사 사진도 마찬가지다. 전체 행사의 성격을 보여주는 사진이 있고 부수적인 사진들이 있다. 풀 샷으로 찍어야 할 것과 당겨 찍어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한다. 완급 조절이 필요하다. 아마추어들은 이런 데 약하다.

행사 뒤 일이 몰리기 시작했다. 2006년 UN ESCAP(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 교통장관회의를 비롯해 지난 10년간 내가 찍은 대규모 국제행사만 150회 정도 된다.

프리랜서는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가만히 있는데 누가 일감을 던져주지 않는다. 부산의 모든 행사장에는 내가 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가끔 "선생님, 이런 일도 합니까?"라고 묻는다. "돈만 주면 하지"라고 웃으며 대답한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랬다. 현장에서 나는 '찍사'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나를 '작가' '사부' '교수님'이라고 부른다. 파리의 예술가들 중에는 택시 기사가 많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사진 작업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개인 사무실에서 작업 중인 문진우 프리랜서. 위에서 세 번째 사진은 그가 기고한 수많은 잡지들.

연봉 1억? 단명의 지름길!

흔히 직장인을 '예스맨'이라고 한다. 싫어도 회사에 붙어 있으려면 상사에게 "네, 네" 해야 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프리랜서는 직장인보다 더하다. 프리랜서에게는 '노(No·안 돼)'가 없다. 의뢰자가 요구하는 사진이라면 어떤 사진이든 찍어낼 수 있어야 한다. 완벽한 사진 테크닉이 필요한 이유다. 변명도 안 통한다. 오로지 결과물로 말한다.

나는 신문, 잡지 등에 기고도 많이 한다. 사보의 여름호 표지를 의뢰 받았다 치자. 마감은 늦봄이다. 하지만 사진은 여름 느낌으로 가야 한다. 봄에 여름 사진을 찍을 수 있는가? 이미 지난해 여름 사진을 찍어뒀어야 한다. 매체 일의 경우 언제 어디서 어떤 사진을 요구할지 모른다. 눈에 보이는 족족 찍어놓고 데이터 정리를 잘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외장 하드디스크만 10개가 넘는다. 외출할 때도 늘 플래시를 장착한 카메라를 휴대한다. 밤낮으로 지나다니다 재밌는 장면이 있으면 찍어둔다. 세상은 인간에게 두 번의 셔터 찬스(사진이 잘 찍힐 수 있는 순간)를 허락하지 않는다.

출장 갈 때는 사다리를 꼭 챙긴다. 비행기 탈 때 정말 번거롭고 귀찮다. 하지만 사다리는 또 다른 각도에서 세상을 보게 한다.

사실 가장 찍기 괴로운 사진 중의 하나가 단체 사진이다. 만찬 행사 같은 게 있으면 참가자들이 식사를 다 하기를 기다렸다 단체 사진을 찍는다. 천편일률적인 사진이지만 사다리가 있으면 달라진다. 연단 밑에서 사람들을 찍으면, 눈을 내리깐 표정이 된다. 얼굴이 안 예쁘다. 사다리 위에서 찍으면 소위 말하는 '얼짱 각도'가 된다. 눈도 더 커 보인다.

강의 활동도 내 생활의 주요 축이다. 그동안 경성대, 신라대, 영산대 등에서 보도 사진과 사진 기초 이론을 가르쳤다. 지금은 동아대 조각과에서 영상 기법을 강의하고 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일반인을 위한 강의도 한다. 온·오프라인에서 활동 중인 사진단체 '중강' '신사동(신세계 사진 동우회)'도 지도하고 있다.

단순하게 돈벌이만 생각한다면, 사진으로 고액 과외만 해도 먹고 살 수 있다. 그런데 요새 애들말로 그거 얼마나 찌질한가. 강의료는 절대 비싸게 받지 않는다. 돈의 유혹이 없을 수는 없다. 늘 추해지지 말자 다짐한다.

돈보다는 일을 우선해서 계속 뛰어야 한다. 프리랜서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10곳 이상의 거래처가 확보돼야 한다. 매년 한두 곳의 일감이 떨어져 나가고, 또 다시 생긴다.

일거리가 많을 때는 연수입 1억도 찍어봤다. 지금은 그렇게 일하지 않는다. 단명하기 딱 좋다. 벌이는 내 또래 직장인들 수준은 된다. 은행 지점장 하는 친구도 나를 부러워한다. 자기 좋아하는 일 하면서 먹고사니까.



사라지는 것을 담는 사진가

나는 '프리랜서 포토그래퍼'다. '찍사'가 아니다. 당연히 작품 활동도 해야 한다. 그동안 개인전만 열 차례 열었다. 기획전 참가까지 따지면 수십 차례다.
녹색 접착 테이프로 칭칭 감은 낡은 카메라는 그가 현장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사진을 찍는지 짐작케 한다.

요즘 나의 관심은 사라지는 것들을 향하고 있다. 산복도로, 매축지, 물만골 등을 꾸준히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최근 1년 3개월 동안은 시민공원으로 변신할 하야리아를 담아왔다. 그간 찍은 사진만 1만 5천여 장. 이달 12~18일 경성대 제1미술관에서 전시회도 연다. 제목은 '하야리아, 사진 속에 잠들다'. '잠들다'라고 했지만 내 사진 속에서는 영원히 살아남는 거다. 그게 사진의 힘이다.

좁은 골목도 내 카메라가 향하는 공간이다. '골목과 부산사람들'이란 모임에서 사진 기록을 담당하고 있다. 문현동에 가면 골목에 무덤이 있는 곳이 있다. 그야말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예전에 치과의사들을 데리고 그곳에 출사를 갔다. 한 여자 치과의사가 깜짝 놀라더라. "선생님, 세상에 이런 데가 있습니까?"

나는 이런 부산이 좋다. 솔직히 프리랜서 활동을 하기에 부산 시장은 작다. 큰 프로젝트도 없고, 단가도 낮다. 서울에서 일했더라면 수입이 배는 되었을 거다. 하지만 부산이 좋으니까 남아있다.

사진과 관계된 사람들이 참 많아졌다. 그런데 아이디어, 머리로만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안타깝다. 머리보다는 따뜻한 가슴과 부지런한 발이 먼저다. 특히 프리랜서는 게으르면 망한다.

사진은 내게 운명이다.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안주하지 않는다. 가끔 최민식 선생님을 두고 말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니는 찍어나 봤나?" 평생 한 가지 주제, 한 가지 일에 천착하기란 쉽지 않다. 나도 계속 사진을 찍고 싶다, 카메라 들 힘이 있을 때까지.

글=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

사진=이재찬 기자 chan@


약력

1959년 부산 출생

1978년 동아대 영문과 입학

1988년 부산매일신문 입사

1991년 봉생문화상 언론부문 수상

1993년 첫 개인전 '불감시대'

1998년 동아대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

1999년 포토갤러리 051 개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촬영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 촬영

2006년 UN ESCAP 교통장관회의 촬영

2011년 열 번째 개인전 '하야리아, 사진 속에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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