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실 간다 작가들의 도시마을 보고서] 25. 고향마을로 가는 마실 - 부산 영도구 대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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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깡' 울림에 삶은 단단해지고

대평동 바닷가는 고요함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분주하고 고단한 생활 공간이다. 선박을 수리하는 조선소에서 들려오는 망치 소리만 공간을 가득 채울 뿐이다. 그래서일까. 밋밋한 일상에 대한 권태로움 속에 무언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가고 싶은 곳이다. '깡깡' 울리는 망치소리는 치열하게 생을 담금질하라는 죽비와 다름없다. 사진=정우련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는, 밋밋한 날들이 길어지면 불현듯 영도에 가고 싶어진다. 차라리 상처받고 피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무언가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질 때, 치열하게 생을 담금질하고 싶을 때, 그때도 나는 영도에 가고 싶다.

자갈치시장 맞은편에 있는 영도 대평동 바닷가는 내 고향 마을이다. 2년 전, 나는 송정연가를 미처 못 다 부르고 부산진구 개금2동으로 이사를 했다. 두고 떠나온 송정바닷가도 그립고 아쉽지만, 내게 더 사무치게 그리운 곳은 역시 대평동 바닷가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입학 전에 잠시 경북 성주의 외가에서 보낸 이태를 빼면, 나는 부산을 떠나 산 적이 한 번도 없다. 할아버지 정수철 씨는 왜정 때부터 대평동 2가에 있는 지금의 삼화조선소에서 공장장으로 일했다고 한다. 해방되고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할아버지에게 조선소를 부탁한다고 했을 정도로 솜씨있고 성실했다고 들었다. 내가 아이였을 때, 우리 가족은 조선소 사택에서 살았다. 일본식 다다미방이었는데 무슨 회랑 같은 것이 있어서 어린 내게 마치 미로처럼 느껴졌던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할아버지가 조선소를 퇴직하면서, 골목 안 공동우물가 옆에 있는 기찻길처럼 길다란 단칸방으로 이사했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좀 전이었다. 그 골목 안에서 나는 스물 한 살까지 살았다.

"송정 바다가 일상을 접고 휴식하는 곳이라면
대평동 바닷가는 고단한 생활의 공간이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백사장도 고요도 없다"

서면에서 지하철을 타고 중구 남포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보니엠의 '바빌론 강가에서(By the rivers of Babylan)'가 흘러나왔다. 도시철도 1호선에서 간혹 마주치는 추억의 팝송 시디를 파는 아저씨가 틀어준 곡이었다. 주말이어서 도시철도 안은 만원이었다. 나는 도시철도 손잡이를 잡고 서서 팝송을 따라 흥얼거렸다. 무언가 지난날의 아련한 기억들이 가슴속에서 스멀거리는 느낌이었다.

남포동역에 내리자 겨울바람이 찼다. 남포동에서 영도 대평동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영도다리를 건너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포동 도선장에서 통통배를 타고 가는 방법이다. 모처럼 대평동으로 마실 나가는 길이니 통통배를 타고 싶었다. 한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부산사람이면 다 아는 이 도선장은 100년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어릴 때, 대평동 도선장에서 친구들과 30원인가 하는 편도요금을 내고 타면 남포동에 내리지 않고 왔다 갔다 하며 놀았다. 배에서 내리지 않는 이상 요금은 탈 때 한 번만 주면 그만이었다. 관리하는 아저씨에게 들켜 야단맞고 쫓겨나지만 않으면 몇 번이고 왕복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서구 동대신동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하느라 자주 탔다. 당시 고등학교 진학을 못한 초등학교 여자동창이 도선장 요금소에 가끔씩 앉아있었다. 어느 겨울날, 내가 요금을 내밀었더니 실금처럼 갈라진 그녀의 튼 손이 내 손을 말없이 밀어냈다. 몇 번 더 그렇게 공짜 배를 탄 기억이 난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이름도 까맣게 잊은 그녀의 튼 손이 떠오르면 어젯일처럼 마음이 아릿하다.

가슴 설레며 달려간 남포동 도선장에, 통통배는 없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닌 걸로 알고 있었는데. 부산바다문화의 상징이 또 하나 사라진 것이다. 나는 터덜터덜 영도다리를 건넜다. 다리 중간쯤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아침에, '영도가자' 하고 몇몇 동창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 중 대평동 마실길에 동행하겠다는 고마운 친구 H의 전화였다. H는 전교어린이회장을 했는데 여전히 영도에 살고 있다. 그러니 나보다는 대평동에 대한 기억이 많을 것이었다.

송정바닷가가 일상을 잠시 접어두고 휴식하는 공간이라면 대평동 바닷가는 분주하고 고단한 생활의 공간이다. 대평동 바닷가는 아름다운 백사장도 고요도 없다. 하루 종일 선박을 수리하는 조선소에서 들려오는 깡깡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선박을 새 단장 할 때, 먼저 배에 붙은 조개나 녹을 망치로 두들겨 떼어내야 페인트칠을 할 수 있다. 이때 나는 망치 소리가 '깡깡, 깡깡' 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깡깡이다. 조선소는 우리 집 골목을 나서면 지척이었다. 기름때에 절은 작업복 차림으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일하러 가는 깡깡 아줌마들을 자주 보았다. 조선소는 울도 담도 없는 넓은 공터를 끼고 있어서 지나다니면서 아줌마들이 깡깡하는 모습이 다 보였다. '아시바(비계)'를 타고 하루 종일 '깡깡망치'를 두드리는 모습은 늘 아슬아슬해 보였다. 간혹 아시바에서 떨어져 다치는 사고도 일어났다. 대평동의 어느 조선소에나 깡깡 아줌마들이 있었다. 우리 골목에 사는 친구 엄마도 깡깡을 했다. 이 친구가 엄마를 무척 창피해하던 기억이 난다. 함께 놀다가도 작업복을 입은 엄마가 멀리 나타나면 숨어버렸다. 그 친구는 비오는 날을 좋아했다. 엄마가 깡깡을 쉬는 날이라고.

넓은 조선소 공터에는 지름이 내 키보다 크고 길이가 10m가 넘는 둥근 통나무들이 층층이 쟁여져 있었다. 선박 건조에 쓰였음직한 그 통나무 더미가 우리에겐 훌륭한 놀이터였다. 어느 해 부산에 폭설이 내렸을 때, 조선소를 하얗게 덮었던 눈이 생각난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몰려나와 눈사람을 만들고 눈 쌓인 통나무 위에 봄, 꽃, 나비, 학근이 바보 따위의 글씨들을 쓰면서 놀았다. 한여름이면 더위를 이기지 못해 기름이 떠다니는 바닷가에 기어이 뛰어들곤 했다. 기름기가 떠다니는 바다지만 바닷속은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새끼게며 건조선 침목 밑에 붙은 담치(홍합), 툭 건드리면 배를 빵빵하게 부풀리는 앙증맞은 복어새끼, 몸 색깔이 시커멓고 징그럽게 생긴 연체동물인 군수(군소) 등을 잡아서 장난치고 놀았다. 승리창고, 대성창고 앞 바닷가는 익사사고를 우려한 수영금지구역이었다. 그러나 새카만 여름 아이들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그 바닷가에 한 번쯤 뛰어들지 않으면 대평동 아이가 아니었다. 서둘러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성급히 바다로 뛰어들던 남자아이들 사이에 끼어 여자아이들도 속옷만 입고 물에서 놀았다. 물속에서 정신없이 놀다 나와 보면 파출소 순경아저씨가 벗어놓은 옷을 걷어가 버리곤 했다. 아이들은 사거리에 있는 대평 파출소까지 몸에 물을 뚝뚝 흘리면서 창피를 무릅쓰고 옷을 찾으러 가야했다. 두 손 들고 벌 서고 훈계를 들은 뒤 옷을 받아들면 그 뿐이었다. 다음날은 옷을 꼭꼭 숨겨놓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아이들과 순경아저씨의 숨바꼭질은 여름 내내 계속되었다. 아이들이 순경아저씨의 눈을 피해 뛰어드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물류창고에 보관해둔 오징어가 나가는 날이면 동네 잔치나 다름 없었다. 오징어가 몇 트럭씩 줄지어 나갔다. 그럴 때, 날쌘 아이들이나 큰 오빠들이 트럭 짐칸에 뛰어올라 오징어를 훔쳤다. 웬일인지 트럭은 덮개도 씌우지 않고 오징어가 노출된 채 천천히 지나갔다. 트럭에 오른 오빠들은 오징어를 뭉텅 뭉텅 집어서 땅바닥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트럭이 삼거리에 있는 파출소를 지나가기 전에 뛰어내렸다. 운전기사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묵묵히 차를 운전할 뿐이었다. 우리는 별 죄책감도 없이 훔친 오징어를 아프도록 씹어먹었다.

화공약품과 용접가스냄새가 뒤섞인 매캐한 선착장 길로 들어선다. 내겐 너무나 익숙한 곳이다. 언젠가 이 길을 지나가다 가스통이 터져서 질식할 것 같은 냄새 때문에 정신없이 뛰어달아나던 기억이 떠올랐다. 길을 걸으면 이렇듯 죽은 기억까지 되살아 난다.

어느덧 대평동 도선장이다. 통통배는 얌전히 묶여 있고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내가 살던 골목길을 찾아가본다. 공동우물은 오래전에 없어졌지만 골목안의 집들은 그대로다. 세월의 삭풍에 낡고 빛바랜 집이었지만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들이 그렇게 정겨울 수 없다. 대평동의 골목길은 중국 후통거리의 깊숙한 골목길과 그 오래된 집들을 떠올리게 한다. 대평동은 유난히 골목길이 많은 동네다. 그 골목길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미로처럼 얽혀있거나 겨우 한 사람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들. 나는 그 정겨운 골목길들을 하나씩 돌아다닌다. 까맣게 잊었던 친구들과 이웃들의 정다운 얼굴이 앞다투어 떠오른다.

H가 마실길에 동행한 것은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였다. 오리털 파카를 입은 가벼운 차림이다. 그는 다짜고짜 대평동에서 슈퍼마켓을 한다는 J에게 나를 데리고 간다. J는 대평동의 과거와 현재를 훤히 꿰고 있다. 그는 온장고에서 캔커피 두 개를 꺼내 H와 내게 하나씩 건넨다. 나는 따뜻한 캔커피로 언 손을 녹인다. 그는 아직도 마을 한 가운데에 그대로 남아있는 문방당 문구점을 가리킨다. 문구점 옆으로 난 비좁은 골목길도 그대로다. J에게서 이름도 가물가물한 동창들 소식을 전해 듣고 나와 우리는 동네를 한 바퀴 돈다. 5월이면 빨간 줄장미가 담을 타고 내려오던 H의 집 앞에 가본다. 동네에서 제일 예쁜 집 가운데 하나였던 H의 집 앞을 지나다니면서 줄장미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담을 허물고 마당까지 건물을 지어 옛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골목길 안에 있는 주택들과는 달리 길가의 주택들은 거의 이주를 하고 공장이나 선박부품을 파는 상점들로 바뀌어있다. 대명콤프렛사, 비케이마린, 진일상사, 신강노즐테크, 대아마린, 성주철재, 그린용접봉….

대평동이 내게 마냥 행복한 공간만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태생적 명랑함으로 내게도 유년은 유쾌하고 즐거운 기억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성장통이란 어떤 아이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통과의례인 법. 내성적인 아이였던 내게 그것은 좀 더 지독했다.

한때 내가 사는 곳이 고인 물처럼 답답했던 적이 있었다. 매일 어디론가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실제로 떠날 계획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마도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살아오던 대로 지내게 될 것이다.

집 앞 조선소에서 진수식이 있는 날이면, 새로 단장한 배가 알록달록한 깃발을 꽂고 바다로 나가던 풍경이 떠오른다. 아시바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쳐 누워있던 친구 엄마의 얼굴이 오버랩되면서.






정우련 소설가

◇약력=199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2000년 부산소설문학상 수상, 2004년 부산작가상 수상, 소설집 '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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