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 해양노마드 1 / 지중해의 무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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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바다에 펼쳐진 이동과 정주의 ‘길항’

그림 고대 페니키아인의 배 부조 http://gossamerstrands.com/Hist100/lecture6.htm에서 캡처

인류의 출현 이래 끊임없이 이어져온 이동. 그 이동은 초원에서는 유목민의 말과 수레로, 바다에서는 페니키아인의 갤리선, 바이킹의 오세베르와 대항해시대의 범선을 타고 이어졌다. 이동하기 위해 정착했던 이들은 때로는 교류하고 때로는 노략질하면서 세상을 바꾸고 지배했다. 

그 가운데 배라는 수단을 통해 해양을 누비며 세상을 지배한 사람들. 지중해와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나라의 근원을 이룬 그리스와 페니키아인들, 북구의 바이킹과 베네치아인들은 해양의 유목민 바로 ‘오션 노마드’다. 

오션 노마드들이 쉼 없이 이동하면서 전파하며 나누고 개발한 것에는 돛과 키와 향신료, 나침반뿐만 아니라 경험과 지식과 유전자도 포함되어 있다. 글자, 법, 지도, 자유와 평등의 가치관까지 모두 노마드들의 발명품이며 그들이 날라준 것들이다.

호머는 인간이 왜 끊임없는 여행을 하는지 설명하고 있으니 그 작품이 바로 ‘오디세이’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해 저문 수평선에 배를 띄운 오디세이와 바그다드의 신드바드도 나폴레옹만큼 의미 있는 역사의 주인공이지만 언제나 세계사의 변방에 밀려나 있었다. 이 오션 노마드 이야기, 정착민들의 이야기만큼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를 SEA&은 새해부터 다룬다.
인간은 땅을 소유하면서 정착의 유혹에 빠진다. 승리와 정복이라는 땅의 절대적 개념에 고착된다. 그것이 바로 울타리치기이다. 결코 쉼이 없고, 빚이 탕감되지 않으며 종들이 풀려나지 못하고 모든 종류의 변화를 멈추어버린다. 그러나 바다에는 울타리가 없다. 바다는 변화무쌍한 상호소통, 경계허물기의 무대다.

‘오션 노마드’에는 고대 해양세력과 그리스 로마시대 지중해를 무대로 세력을 넓혀간 해적들, 사라센의 무법자와 북대서양을 종횡으로 누빈 바이킹, 신세계를 들었다 놓은 카리브해의 해적들, 인도양의 방랑자들과 중국의 해적들, 동북아의 왜구세력, 이슬람의 해상세력 바그다드의 상인, 신드바드와 바다의 실크로드의 중심 멜라카 한자의 동맹 등의 항로를 12번에 걸쳐 따라가 본다.

글 차례

1. 지중해의 첫 무법자 
2. 로마가 물러간 바다 
3. 북구의 낯선 얼굴 
4. 르네상스와 동고동락
5. 신대륙의 주변인
6. 불멸의 해적 전설 온상
7. 노략질의 바다로 나간 어부들
8. 아시아의 바다를 내집 드나들 듯
9. 해상 실크로드를 장악한 세력들
10. 지중해를 쥐락펴락한 상인들
11. 돈의 바다로 나온 ‘노스 페이스’
12. 에필로그

페니키아인 지중해의 패권 잡다

지중해는 태평양과 대서양과는 달리 내해다. 바다 주변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과 같은 육지가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내해인 탓에 지중해는 이렇다 할 바람과 해류 수초가 없어 수중에선 산소와 먹이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육지에서 흘러드는 강물이 다량의 석회 성분을 함유해 어종 역시 다양하지 않다. 그나마 잡힌다 해도 별다른 맛이 없다. 자연히 어업보다는 항해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중해는 어로의 터전이 아니라 해상무역의 활동무대였고 주변 국가들은 해양국으로 발전했다. 

이같은 지중해를 먼저 장악했던 민족은 뛰어난 항해술을 가졌던 페니키아 사람이었다. 이들은 이미 기원전 2700년에 무역을 위해 항해를 했고 기원전 1000년경 페니키아 사람들은 지중해에서 가장 뛰어난 항해술을 자랑하였다. 하늘의 해와 별을 보고 항해하는 천문 항해술을 개발, 밤에는 물론 며칠 이상씩 걸리는 장거리 항해도 가능케 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장거리 항해가 가능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지금의 아프리카와 유럽 곳곳으로 이동해간다. 그리고 그곳 해안에 성벽과 대를 쌓고 정착하는 폴리스를 이룬다. 아프리카 끝 지역에 가서 세운 도시가 카르타고이고 스페인북단에 닿아서 도시를 건설한다. 성서에는 요나가 신탁을 거스르고 가려고 했던 ‘다시스’가 스페인 남단의 페니키아 식민지 타르테수스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바울이 기독교 전파를 위해 당시 로마제국의 무역로를 따라 서바나(스페인)로 가려고 많은 애를 쏟았다는 기록이 신약성서에도 나온다.  

페니키아인들이 가는 곳엔 각지에서 흘러온 부가 넘쳐났다. 무역으로 성시를 이룬 곳에 약탈자들도 따라다니는 법. 때문에 이 시기에 바다의 불청객 약탈세력이 등장하는 것은 필연인 것이다. 북아프리카나 사르데냐, 그리스 섬의 그늘에서 페니키아 인들의 부를 노린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나타난다. 바다의 이동자 해적들의 출몰이다. 

피라미드 보다 앞선 해적들

고대 지중해의 해적 이야기는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BC 3천 년부터 무역이 있는 곳에 양념처럼 등장하였지만 그러나 기록에 등장하는 해적은 BC 14세기 해상무역과 이동의 중심 지중해를 공포로 몰아넣은 ‘루카’라는 이름의 해적들로 현재의 터키가 있는 해안 아나톨리아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강도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아멘호텝 3세(BC  1390~1352) 시대부터 이집트의 지중해안 지역을 침략하였다. 아켄아텐(BC 1352~1336) 때 이르러 아나톨리아 출신 루카에 관한 언급이 등장한다. 현재 키프로 지역을 다스린 알라시아의 왕이 이집트 파라오에게 보낸 외교문서에는 “알라시아가 마치 이집트 해안을 약탈하는 ‘루카 족’을 사주하거나 도와주는 것으로 오해를 받고 있는데 알라시아 자체도 ‘루카 족’의 피해자”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

당시엔 이미 이집트에서 발명된 돛과 키를 장착, 높은 이동성을 가진 배들이 사용되고 있었다. 초기의 해적들은 노를 젓는 일종의 갤리선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양쪽에 10~25개의 노를 가진 갑판이 개방된 작은 배였다. 이에 비에 상인들의 배는 화물을 적재하기 위해 갑판이 넓은 배였기에 날렵한 해적선을 따돌릴 수 없었다. 해적들은 섬 뒤에 숨어 있다가 상선이 나타나면 날쌘 배를 이용하거나 더 작고 빠른 배로 소아시아를 항해하던 선박을 공격해 화물을 빼앗거나 사람들을 끌고 가 노예로 삼았다. 

그들은 지중해를 휘젓고 다니면서 약탈과 노략질을 감행했고 이집트의 적인 히타이트 제국과도 나라로서 동맹을 맺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이들의 쇠퇴와 소멸은 이후 나타난 ‘해양민족’으로 알려진 또 다른 오션 노마드에게 동화된 것으로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그림 람세스 3세(1184~1153) 때는 나일 강변으로 다가오는 해양민족의 함선을 향해 해안을 따라 사수들을 배치하고 화살을 쏘게 했다.

‘해양민족’ 지중해를 공포의 바다로

BC 13세기 말과 12세기 초 지중해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매우 무시무시한 집단이 나타난다. ‘해양민족(The Sea Peoples)’은 에게해 출신 여러 민족들의 포괄적인 명칭으로 알려졌다. 이집트 연대기 사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에게해나 아드리아해 서부 지중해에서 이주한 부족들을 말하는데 카르낙의 아문 신전 벽에 새겨진 부조 기록은 샤르덴, 쉐클레쉬, 아카와샤, 루카, 투르샤 등 5개 부족의 실체를 말하고 있다. 이집트와 연관된 해양민족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아멘호텝 3세와 4세 시대에 기록된 아마르나 서신, 람세스 2세의 카데쉬 전투 기록, 메르네프타 승전비, 람세스 3세의 장례신전 기록 및 부조, 헤리스 파피루스, 웬아문 등을 통해서 확인된다.

이집트인들의 눈으로 보면 해양민족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세상이 아닌 북쪽 끝에서 배를 타고 이주해온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격적인 부족이었다. 머리에 깃털로 장식한 투구를 착용하고 짧은 치마를 걸치거나 뿔 장식의 투구를 쓴 이들은 해상무역을 주물렀고 동시에 약탈도 서슴지 않았다. 떼로 몰려와 선박과 해안도시를 습격하고 이집트를 제외한 다른 모든 대항세력을 물리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과시했다. 이들 해양민족의 최대공헌은 뜨거운 용광로에서 철을 녹이는 기술 즉 철기문명을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입한 것이었다.

번영을 구가하던 이집트 제국은 메네르프타와 람세스 3세 때에 해양민족들의 잦은 공격을 받게 
된 이후로 급속히 쇠약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메르네프타는 BC 1209년 나일강 삼각주로 쳐들어온 대규모의 해양민족 동맹군을 맞아서 6,000명이 넘는 적을 죽이고 포로로 잡았다고 ‘이스라엘 석비’에 새겨놓았다. 바다에서는 약체로 유명한 이집트인들은 이 무렵 히타이트를 멸망시키고 몰려온 해양민족을 육지에서 막아내었다.  

이후 람세스 3세(1184~1153) 때는 나일 강변으로 다가오는 적함을 향해 해안을 따라 사수들을 배치하고 화살을 쏘게 했다. 그런 다음 이집트 해군이 갈고리를 던져 적함으로 넘어가 백병전을 치렀다. 육상에서 시작한 공격을 해상에서 마무리한 협동작전인 셈이다. ‘헤리스파피루스’는 “나의 국경에 도달한 자들의 심장과 영혼은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바다를 통해 다가오는 자들은 나일 강 입구에서 불길을 마주했고, 해안에서는 그들 주위로 장창 부대가 방책을 쳤으며, 결국 해변에서 패배하여 살해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체더미에 던져졌다”고 전한다. 이 전투 이후 해양민족의 준동은 종지부를 찍었고 이후로 그들의 세력은 정착민으로 흡수되고 궤멸되고 말았다. 헤리스 파피루스에는 메르네프타 시대와는 또 다른 5부족의 이름 다니엔, 체케르, 블레셋, 샤르덴, 웨쉐쉬가 기록된다. 

한편 우가릿, 키프로스, 므깃도, 하솔 등은 이집트 번영의 근간인 하부 물류도시라 할 수 있는데 이 도시들이 해양민족의 잇따른 공격으로 잿더미가 되고 폐허가 된다. 우가릿의 마지막왕은  “바다 쪽에서 함선이 쳐들어 와서 도시를 불태우고 큰 피해를 입혔다”는 문서를 남겼다. 하부 물류중심지들의 몰락은 상부 구조인 이집트 무역체제의 붕괴를 불러왔고 나라의 형편도 계속된 해양민족의 침입으로 재정이 바닥나고 쪼그라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중근동의 패권은 자연스레 지중해 북쪽으로 옮겨가게 된다. 청동기 시대의 종말도 이들의 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해진다.
그림 돌고래로 묘사된 해적들이호시탐탐 노리는 지중해를 항해하는 고대 그리스의 배

그리스의 약탈자들

BC 12세기 농경민인 도리스인들이 철기문명을 가지고 문명세계의 그리스 본토로 급격하게 침입해왔다. 이른바 ‘도리스인의 침입’으로 고대 그리스인은 도리스인의 남하 정주를 ‘헤라클레스의 자손의 귀환’이라고 일컬었다. 도리스인이 점령하여 거주한 지역은 티라섬 ·크레타섬 ·로도스섬 ·키레네 ·소아시아 남서안까지 미쳤고, 후에는 흑해 연안 ·시칠리아섬과 남부 이탈리아까지 진출하여 많은 해안의 식민도시를 건설하였다.  

원래는 바다를 모르던 도리스 그리스인들은 해안에 정착하면서 부족한 곡물을 찾아서 흑해라든가 이집트와의 해상교역에 눈을 돌리기 시작, 해양민으로서 번영하였다. 오늘날에도 뱃사람으로서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그리스인이 적지 않고 그리스가 지구촌 선박과 해운을 호령하는데 그들의 연원은 꽤 역사가 깊은 셈이다. 

한편 BC 10세기에 이르러 도리스 사람들은 크레타 섬을 기지로 삼아서 해적질을 펼치면서 그들이 짓밟은 미노스 문명의 새로운 해석자가 되었다. 호머의 오디세이에는 ‘크레타 사람=해적’으로 묘사할 정도다. 800년 동안 해적의 은신처로 사용된 크레타는 약탈한 상품과 생포한 노예들, 밀수품, 문화의 번화한 시장을 제공했다. ‘모든 크레타인들은 거짓말쟁이’라는 유명한 역설의 명제는 배신과 거짓말을 일삼은 크레타의 해적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디세우스가 귀국 도중에 도시를 공격해서 부녀자와 재물을 약탈한 것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기록하고 있다. 투키디데스의 저작에도 약탈에 대한 대목을 볼수 있다.  

BC 4세기 결성된 아이톨리아 해적 동맹이 위세를 떨치다가 기원전 192년에 로마에 의해 소탕되면서 해상세력은 시칠리아로 이동한다. 시칠리아의 리파리섬과 발레아레스섬 리구리아 해안에 정착촌이 생기고 해적들의 기지가 만들어져 지중해의 교역을 거의 마비시킬 정도로 악명을 떨친다. 물류의 흐름을 가로막아서 자칫하면 로마의 번영이 흔들릴 뿐 아니라 심지어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곡물 공급까지 중단될 위험도 컸다.

기원전 7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해적들에게 6주 동안 잡혔는데 해적들은 카이사르의 몸값으로 20달란트를 제시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오히려 50달란트를 주겠다고 해서 풀려났다는 일화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사위 폼페이우스가 지중해 전역에서 해적을 소탕했다. 그는 해상 작전만 펼친 것이 아니라, 실리시아 같은 육상 해적 근거지에 대한 공격까지 감행했다. 그리고 끝까지 저항하는 자들은 가혹하게 진압했지만, 항복하는 사람들은 노동력이 부족한 지역으로 보내 새로운 정착의 삶을 살도록 주선했다. 해적들은 해양유랑의 생활을 종지부를 찍고 정착민으로 변신한 것이다.

노략의 행보 리뉴얼의 원천

고대 중근동의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속도로인 바다루트를 장악한 루카스 해적과 해양민족, 그리스 해적들은 바다를 항해하는 기술을 이용, 각지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재창조하고 다시 세계로 전파하는 오션노마드였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해적은 아니라도 크게 보아서 해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 통설이다. 지중해 세계는 번번이 해양노마드에 의해 질서가 재편되고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들의 왕성한 이동과 침략과 노략의 행보는 고대중근동과 지중해 세계를 돌아가게 하는 또 하나의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해양민족과 해적들의 문화는 약탈과 파괴 그리고 재창조의 문화였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약탈해야했고 파괴해야했다. 그것에 대항하는 도시들은 때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도 했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기도 했다. 고대 지중해의 첫 유랑민들은 중근동의 역사와 문화 전체를 역동적으로 창조한 세력이었다.

SEA&강승철기자ds5bsn@busanilbo.com
도움말=이스라엘 연구소 이일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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