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신춘문예-평론]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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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의 '시'에 드러난 영화형식 및 영화매체적 특징에 관하여

그래픽=노인호 기자 nogari@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이창동의 '시'에 드러난 영화형식 및 영화매체적 특징에 관하여

서은주



1. '내용'에서 '형식'으로

소설가라는 남다른 이력을 가진 이창동감독이 소설이 아닌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예술적 화두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어떻게 하면 문학이 아닌 영화 특유의 형식으로 나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을까'가 아닐는지. 그러나 그의 영화는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라는 영화적 '내용'에 대한 관심 탓에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영화적 '형식'은 등한히 해왔다. 즉, 이창동의 영화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편집과 같은 영화적 기술로 인해 생성되는 이미지나 이미지의 연결 그 자체를 통해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게 하기보다는 영화의 내러티브와 인물의 행위를 문학적 비유 및 상징과 잘 버무려 영화적 주제를 전달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영화가 '세상을 향한 창'이라는 기조 하에 리얼리즘을 표방한 그의 카메라는 특별한 조작 없는 현실의 핍진성, 그 자체를 여실히 보여주는 연출적 방식에 갇혀있었다. 그는 결코 영화 이미지의 '형식'을 통해 영화적 의미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스토리텔러', 즉 영화가 환영적으로 환기하는 이야기 '내용'을 통해 영화적 의미를 만들어왔던 사람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이창동 영화는 영화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문학적이고 또 연극적이었다. 왜냐하면 영화비평가 유운성의 단언처럼 영화는 '세상을 향한 창'이 아니라, 영화 그 세계만으로 자족적인 '창 없는 모나드(라이프니츠의 monade)'이므로.

그러나, 그의 다섯 번째 영화 <시>(2010)는 전작들과 달리 영화적 형식에 관한 특별한 관심이 엿보인다. 물론 그의 전작들에서부터 드러난 주제가 이 작품에서도 면면히 흐른다. 첫 영화 <초록물고기>(1997)에서부터 시작되는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고통 받는 한 인간의 모습은 <박하사탕>(1999), <오아시스>(2002), <밀양>(2007), 그리고 <시>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드러난 영화 형식의 균열과 영화매체성에 대한 관심은 그의 영화창작 행보에 있어서 다소 벗어난 모습일뿐더러, 비로소 그가 문학을 넘어 얼마간 영화에 접근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게다가 이 영화가 보여준 형식적 특성은 영화내용적인 측면과도 일정하게 조화된다. 더 나아가 그러한 형식적 변화는 관객의 지각형태와 영화 관람태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영화예술의 향유태도가 대중들의 지각형태까지 전환시켜놓으리라고 예견한 바 있다. 그렇게 변화된 관객의 태도가 마침내 사회마저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으리란 전망까지 하면서.

영화의 온전한 내러티브의 전달로 관객이 영화의 환영성에 몰입되도록 하던 그가 이 환영적 내러티브를 균열하는 형식 자체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이 형식적 균열과 변화는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그리고 이러한 형식에 대한 관심은 이 영화의 내용과 어떻게 조화되어 있으며, 그로 인한 관객의 지각에는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가. 이 글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촬영이나 편집과 같은 영화장치의 순수 형식과 매체성만으로 영화적 의미를 창조하는 영화들에 비하면, <시>는 아직도 문학적이고, 연극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성취한 영화형식 및 영화매체적 특징에 대해 관심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러한 작은 변화만으로도 충분히 관객을 변화하게 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보였기 때문이다.



2.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를 '본다'는 것

'본다'는 행위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본다'는 지각행위를 제대로 행하며 살고 있을까. 영화 <시>에 등장하는 '김용탁 시인'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잘 '보는' 행위라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며 살고 있는지 실로 의문스럽다. 잘 '본다'는 것은 결코 일상적인 개념의 평범한 지각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김용탁 시인의 말처럼, '다양한 관점에서 대상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것이고, 대상을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며, 끊임없이 대화하려'는 지각행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렇게 대상을 제대로 보게 되면 '샘에 물이 고이듯',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으로 '창조 이전의 세계' 즉,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바로 그러한 세계가 '시'의 세계라고 덧붙이면서.

영화 초반, 주인공 '미자'가 참여한 시 수업에서 한 김용탁 시인의 이 말은 바로 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져주는 전언이기도 하다. 메인플롯으로는 미자가 한 편의 시를 써보기까지의 과정을 크게 그려놓고, 서브플롯으로 미자가 희진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매달아놓은 이 영화의 전체구조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시란 무엇인가,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시 강의 총론을, '미자가 희진의 고통을 나눠가지는 이야기'라는 각론으로 세세하게 펼쳐보인 것이라고. 그러므로 '시'를 강의한 이 영화는 결국 진정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관객이 적극적으로 고민해보기를 염원하는 영화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영화 초반 미자가 정회장네 슈퍼에서, 희생당한 희진얘기를 건넸을 때 무관심으로 귀를 닫았던 많은 사람들을 눈여겨볼 만하다. 대상을 잘 '보'지 못하는 그들의 속물적인 특징은 희진사건을 대하는 가해자아버지들에게서 한 번 더 중첩되어 그려진다. 가해자 아버지들이 희진사건을 '보'고 또 해결하는 방식은 미자의 태도와 무척이나 대조적이다. 이 영화는 제대로 '볼' 줄 아는 예민한 감성과 시력을 가진 미자와 도덕적으로 둔감한 탓에 제대로 '볼' 줄 모르는 가해자 아버지들 각각이 희진사건을 해결해나가는 태도를 대조하여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삶에서 '본다'는 행위가 진정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하는지를 진지하게 묻는다.

우리는 사물 및 사건을 보거나 인식(표상)하는 데 있어 대상 본연의 모습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가 보고 인식하는 능력에는 자신에게 얼마나 '유용하며 실용적인가'라는 자기중심성이 개입되어있기 때문에. 앙리 베르그손은 인간이 변화하려면 '습관인식(부분기억)', 그리고 이와 대조되는 '순수인식(전체기억)'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순수인식(전체기억)'을 복원시키는 쪽으로 인식의 방향을 교정해갈 것을 역설한 바 있다. 이때 이 '순수인식'이란 '절대적으로 자족적이고, 그것이 생겨난 모습 그대로 존속하며 그것이 동반하는 모든 인식과 함께 다시 환원할 수 없는 한 순간을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수용자인 주체의 특권적인 주관을 버리고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그 즉자성을 인식하는 태도이다. 이는 곧 영화 속 김용탁 시인이 강조한 것처럼, 대상을 '오래오래, 그리고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다가 마침내 발견하게 되는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 즉 '시'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이다.

바로 미자가 희진사건을 바라보는 태도가 그러하다. 희진사건을 처리하는 가해자아버지들의 태도에 동의하지 못하는 미자는 희진의 위령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녀의 고통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하여 목욕을 하다 오열을 터뜨리기도 하고, 가해자인 손자를 분노로 힐난하기도 하며, 희진이 성폭행을 당한 과학실을 몸소 찾아가 희진의 고통을 대리체험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에 처음에는 너무 충격적이어서 도피하기만 했던 희진의 고통을 차츰 내면화하게 된다. 그에 비해 가해자부모들은 자기중심적인 관점으로 문제를 봉합하여 사태를 무마시킴으로써 쉽게 잊어버리려한다. 책임이라는 것도 고통을 받은 희생자의 입장이 아니라 가해자 중심의 유용성과 실용성으로 간단히 처리해버린다. 이는 마치 남의 고통을 진정으로 '보'는 시력을 갖지 못한 채 겉돌기만 하는 현대인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는 듯하다.

무릇,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대상을 다양한 관점으로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마침내 그 '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리라. 이 영화의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장면인 마지막시퀀스를 떠올려보자. 결국 가해자인 손자를 경찰에 넘긴 미자는 그토록 쓰고 싶어 하던 시 한편을 남기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 '아네스의 노래'가 김용탁 시인과 미자, 그리고 희진의 목소리로 차례차례 잇달아 갈마든다. 동시에 카메라는 미자와 희진이 평소 몸 담았던 공간을, 마치 이승을 떠나는 죽은 혼령의 시선인 양 더듬어 보여준다. 여기서 카메라는 김용탁 시인과 미자, 그리고 희진을 하나로 묶어준다. 이러한 연출방식은 진정으로 '본다'는 것이 바로 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되는 것임을 암시한다. 이는 주체와 대상의 대립 없는 합일이며, 그 두 주체가 하나로 엉키고 흐르는 것,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마치 리오타르의 '숭고(Sublime)'와 유사한데, '너'와 '나'의 경계가 해체되어 주체와 대상이 일체가 되는 무아지경의 순간인 것이다.

들뢰즈는 지각이미지에 관해 "객관적 지각에서 주관적 지각으로, 또는 그 역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영화에서 지각-이미지가 갖는 항구적인 운명"이라는 말을 했다. 즉, 주체의 특권적인 시점의 간섭없이 주체와 대상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그 둘의 전이가 불확실해지는 순간에서 우리가 사유해야할 진정한 주체의 모습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이다. 주체와 대상의 분리없는, 그 이질적 주체의 이중적 긴장에서 자연스럽게 대상 자체의 본연한 모습인 즉자성이 드러난다. 이 영화는 미자의 눈을 통해 사물 그 자체의 즉자성을 바라'보'듯이, 희진사건 또한 그렇게 바라'봐'줄 것을 강조한다. 이는 김용탁 시인이 첫 수업에서 말한 '시'의 세계인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라는 것과 맥락이 닿아있다. 사실 미자가 행하는 시 짓기라는 것도 주체와 대상과의 물아일체를 꿈꾸는 문학행위이지 않는가.



3.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줄타기

이창동감독은 한 기자와의 회견에서 "이 영화는 가해자를 손자로 둔 할머니의 고통, 죄의식과 시를 쓰기위해서 찾아야 하는 세상의 아름다움과의 긴장과 갈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라는 말을 했다. '시'라는 영화의 타이틀이 도드라지는 오프닝장면에서부터 이 영화는 강에 떠내려오는 희진의 시체로 대변되는 '추한' 현실과, '아름다운' 이상을 꿈꾸는 '시'라는 세계와의 공존과 긴장을 담아낼 기획임을 암시했다. 우리의 삶은 성스러움과 속됨, 아름다움과 추함이 공존하며 긴장·대결하는 과정 속에서 변화해간다. 여기서 미자는 이 성스러움과 속됨,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아름다움의 여자, '미자(美子)'는 보통사람들과 다르게 예민한 감성과 순수함을 지닌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남들과 다른 면모는 그녀의 '튀는' 옷차림이나 사람을 대하는 절실한 방식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녀는 비현실적이며 다소 초월적인 존재로써 성스러움과 속됨의 경계에 위치한 모습이다. 오프닝이 지난 병원장면에서, 자신의 폰도 아닌 핸드폰 벨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인물, 딸의 죽음에 망연자실해진 희진 엄마의 고통에 남다르게 몰입하는 인물, 그가 모두 다름 아닌 미자이다. 희진의 희생에 미자가 끝내 손자를 경찰에게 넘길 수밖에 없는 이유도 남다르게 감응하는 예민한 감성과 순수함 때문인데, 이는 성스러움과 속됨 사이에서 느낀 고통의 표출이었으리라.

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를 써보려하는 미자 앞을 '추하'고 끔찍한 현실이 막아선다. 시 강좌에서 들은 대로 사과를 제대로 관찰해보려는 미자에게 욱이와 친구들이 들이닥치고, 나무를 조용히 관조해보려는 미자에게 가해자아버지로부터 비극적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전화벨이 울린다. 미자에게 서서히 엄습해오던 현실의 추함이 본격적으로 그녀를 휘감아 옥죄자 견딜 수 없는 고통에 그것을 회피하는 태도로 일단 자신을 안전하게 지킨다. 가해자 부모들끼리의 첫모임 장면에서, 대책을 논의하는 가해자 아버지들을 화면 전경에 두고, 후경으로 뒤편 유리창 너머에 미자를 배치시킨 그 장면의 미장센은 고통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미자의 심리적 상태를 탁월하게 시각화한 것이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벽 너머에 고통을 방치해두고 미자가 도망가 숨은 곳은 '방패'라는 꽃말을 가진 맨드라미 꽃밭이다.

너무 고통스러우면 차라리 망각하고 싶은 것일까. 마침 미자에게 찾아온 질병인 치매는 오히려 고통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주는 방패가 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질병이기만 하던 미자의 이 '추한' 치매는 오히려 현실의 부조리함과 현대인들의 속물근성이라는 수렁에서 그녀를 건져내주는 '아름다운' 치매이기도 하다. 앞에서 언급한 맨드라미 꽃밭으로 도피해버린 장면은 미자가 치매때문에 고통을 회피하게 됨을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치매덕분에 속물적인 가해자 아버지들과 다른 행보를 걷게 됨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후반부에서 가해자아버지가 요청한 거짓위로를 위해 희진엄마를 만나는 장면에서 자연에서 받은 심상을 뱉느라 정작 해야 할 위로의 말을 잊어버리게 된 것도 사실은 치매 탓이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미자는 '추한' 가해자아버지들과 구별된 '아름다운' 도덕성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정한 치매환자는 누구인가. 가해자아버지들에게서 보이는 윤리적 둔감함이야말로 사회적 도덕과 인간적 진실을 망각한 '추한' 치매이다. 이렇게 사회적 도덕과 인간적 가치가 모두 상실해버린 '추한' 치매의 시대, 그리하여 '시'가 더 이상 정의이고 도덕이 되지 못하는 시대, 손자를 경찰에 넘길 수밖에 없는 미자의 마지막 결단은 이 사회에 다시 '시'를 정의와 도덕으로 복권시키려는 과정이다.

시낭송회 사람들과의 뒤풀이 자리에서 시인 김용탁이 역설한 "우리 시대는 시가 죽어가는 시대"라는 말, 이를 이어 황명승 시인이 냉소적으로 뱉은 "시 따위는 죽어도 싸!"란 푸념은 바로 비루한 우리 현실과 아름다운 시가 서로를 긴장,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는 현대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이때, 나약한 노인인 미자는 바로 이 시대 힘없는 '시'의 자리를 상징한다. 아름다움과 추함, 속됨과 성스러움은 공기의 흐름처럼 서로 교류되고 교환되어야 한다. 그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긴장과 줄타기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이가 '미자'라면, 그 둘 사이의 흐름을 노련하게 잘 타며 유희하는 이가 경찰 '박상태'라 할 수 있다. 그는 시낭송회에서 음란패설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속물스럽고 '추한'사람으로 비춰지지만, 사실은 경찰비리를 고발하다 좌천된 전력이 있듯 사회적 도덕을 바로 세우려하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시낭송회 뒤풀이 자리에서 미자는 희진의 고통에 체화되면 될수록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경계를 뛰어넘지 못한 자기 한계와 고통으로 펑펑 울어버리게 된다. 이때 이를 먼저 체험했던 상태가 마치 인생선배인 양 함께 미자의 고통을 덜어주게 된다.

한편, 남의 고통을 진정으로 체화하는 길은 자기 자신이 유사고통을 직접 체험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한 것일까. 힘든 미자에게 설상가상으로 정회장이 한층 더 고통의 짐을 지운다. 미자의 몸을 요구하는 정회장은 바로 희진의 가해자들과같은 폭력적 마초성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정회장으로부터 입은 미자의 상처는 같은 학교남학생들한테 성폭행당한 희진의 고통과 겹쳐지는데, 이는 미자로 하여금 희진의 고통을 이심전심으로 체화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때 미자의 고통은 마침내 '내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을 발표할 때의 장면과 부딪쳐 감정적 공명을 이룬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것이 자칫 추하고 속된 것과의 대결에서 실패할지도 모르게 돼버릴 찰나, 영화는 미자가 발표하는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독백을 빌려 추한 고통의 진흙밭 속에서 생명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라는 연꽃을 간신히 피워올린다. 추함과 아름다움의 경계와 긴장 속에서 존재 그 자체의 소중함을 간신히 건져올린 미자의 고통은 결국 희진의 고통과 맞잡게 되는데, 미자가 희진이 자살한 장소를 직접 찾아가는 장면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희진의 고통을 미자가 아주 고통스럽게 체화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일련의 장면들에서 생명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긴장과 공존이라는 영화적 의미를 편집형식과 잘 조화시킨 탁월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그 공간에서 미자는 희진의 고통에 체화되는 영감을 한 줄의 시로 써 보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을 비웃는 것인지 마치 '시'를 쓰는 것처럼 빗방울이 미자의 수첩에 뚝뚝 떨어진다. 이 빗방울의 존재는 마침내 미자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긴장을 뺏어가 버린다. 성스러움과 속됨 사이의 긴장을 놓아버린 고통의 최고조에서 정회장을 찾은 미자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신의 몸을 허락한다. 수척해져가는 미자의 얼굴은 점점 희생당한 희진의 영혼과 하나가 되어간다. 그리하여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를 지어보임으로써 아름다움과 추함, 성스러움과 속됨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완성해낸다. 이 때 고통의 내면화, 즉 대상에 대한 주체의 동일시는 바로 시 짓기와 이음동의어인 셈이다.



4. '보기'에 대한 또 하나의 고민, '거리두기'

진정한 추모는 희생자의 고통을 대상화하지 않고 추모자자신의 고통으로 내면화할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희진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힘겹게 체화하자마자 미자는 그 내면화된 자기고통을 외화시켜 마침내 도덕적 단죄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미자가 손자를 고발하는 것으로 가해자들을 단죄한 이후 바로 시를 한 편 지어보이는 과정은 죽은 희진에 대한 속죄와 추모의 행위나 다름없다. 미자는 도덕적 단죄에 이어지는 자신의 시, '아네스의 노래'를 통해 속물적이고 '추한' 사람들이 '아름다움'과의 줄타기를 해주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현실에는 이미 죽고 없는 희진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불러왔다.

그러므로 그녀가 쓴 시는 죽은 희진에 대한 추모곡이자 초혼(招魂)곡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영화의 결말인 미자의 실종은 성스러움과 속됨 사이 줄타기의 실패를 의미하기는 하나, 희진의 고통을 자신의 희생으로 대신 갚는 방식을 취했다는 면에서 추모로서는 온당한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갑자기 불려온 희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봐야하는 관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화의 결말은 그 지점에서 관객과 거리두기를 한다. 이 장면은 상당히 의도적인 장치인데, 이는 관객이 영화 속 속물적인 사람들처럼 섣불리 자기중심화된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지 않도록 경계하려는 감독의 강한 의지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 영화가 바로 '보는' 것에 대한 것임은 이미 오프닝과 엔딩장면에서 예견되었다. 영화는 강가에서 보물찾기하던 한 아이가 우연히 강 아래로 떠내려오는 희진의 시체를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대상화된 희진이 엔딩 장면에서는 오히려 시선의 주체가 되어 관객을 대상화하여 바라'본다.' 영화의 결말은 희진이 자살하기 직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희진이 자살하려고 다리난간 가까이 걸어가다 돌연히 몸을 돌린다. 그리고 관객을 바라'보는 것'으로 영화는 멈춘다. 영화는 내내 관객을 영화 속 인물들에 환영적으로 동일시하도록 하다가 끝에 이르러 그러한 특권적 시선과 거리두기를 해버린다. 이러한 영화적 장치는 희진이 추한 현실인 스크린 속을 나오고 싶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관객을 이 상황의 목격자로 만들어 모종의 책임을 느끼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와 같은 이러한 자기반영적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영화 <시>는 '동일시'가 아닌 '거리두기'라는 방식으로 관객과 또 다른 방식의 말 걸기를 한다. 물론 이는 앞에서 말했듯 다소 작의적인 장면으로써 '본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관객이 자기반성적으로 해보기를 바라는 감독의 의도가 묻어나는 부분이다.

그래서 '아네스의 노래'라는 초혼곡을 통해 현실에는 이미 죽고 없는 희진을 스크린 상에서 의도적으로 살려낸 것이다. 영화가 '부재와 현존간의 끊임없는 갈마듦'이라는 크리스티앙 메츠의 말을 도입해보자면, 이 영화의 결말은 관객의 현재에는 '부재'할 뿐인 희진을 불러와 자꾸만 '현존'시키려하는 감독의 절실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영화내내 시선의 주체로 인물과 자신을 환영적으로 동일시하던 관객은 뜻밖에 희진을 만나게 되면서 마침내 대상(객체)으로 좌천된다. 이렇게 스크린에서 분리된 관객의 자아는 순간적으로 머뭇거리며 혼란을 겪는다. 이를 통해 관객은 현재 자신의 존재감과 위치를 각성하게 되며, '본다'는 행위에 대해 반성적 거리를 갖게 된다. 우리 인간은 동물, 기계와는 달리 두뇌를 가진 까닭에 자극으로 인한 지각이 생겨도 자동적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 머뭇거림과 균열의 순간이 있다. 질 들뢰즈는 이 '모호한 지각' 혹은 '망설이는 행위' 사이의 미세한 떨림에서 '시간-이미지'가 도출되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사유해야할 주체의 모습이라 했다. 이러한 머뭇거림과 균열의 주체성, 하나의 특권적 시선으로 동질화되지 않는 다원적인 주체성들 간의 공존과 긴장에서 새로운 세계의 모습인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5. 영화의 매체성과 관객 지각의 변화

영화의 내용과 조화로운 이 영화의 형식은 이를 수용하는 관객의 태도마저도 일정하게 변화시킨다. 영화와 '거리두기'된 관객은 감독의 특권적 시각이 아닌 관객 자기자신의 창조적 시각으로 사물을 보게 되고, 이 때 사물은 자기 고유의 즉자성을 얻게 된다. 영화와 관객, 그리고 감독 각각을 자립적으로 공존하게 하려는 정치적 기획. 그렇다면 그러한 거리두기 방식과 함께 형식적 균열을 가져온 영화장치의 자기매체성은 무엇이고, 그로 인한 관객의 지각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는 것일까.

이 영화에서 이미지를 보여주는 장치, 즉 형식을 통해 이미지의 내용을 말하려는 움직임은 영화초반부터 감지할 수 있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미자가 정류장에 있는 포스터를 보고 '마감됐네'라는 말만 남기고 걸어가는 장면을 한번 주목해보자. 버스정류장에서 본 것이 무엇인지 궁금한 관객을 방치해버리고 미자의 뒷모습만을 쫓던 카메라는, 미자가 집에 거의 도착하는 장면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그것이 시강좌 포스터였음을 밝힌다. 내러티브 를 의식한 일반적인 편집이라면 미자가 정류장에서 포스터를 확인한 장면 바로 뒤에 그 포스터장면을 이어 붙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방식을 택한 이러한 편집적 '쉼'은 사실은 그 포스터 강좌가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될 것임을 의도적으로 강조한다. 물론 인물의 뒷모습장면 뒤에 여운을 남기듯 배치시킴으로써 강좌가 아쉽게도 마감되었다는 의미 도 담고 있다. 사소한 장면이긴 하나 영화적 의미를 생각한 편집, 즉 형식으로 의미를 생성하려는 연출방식이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탁월한 연출방식은 여기서만 멈추지 않는다.

무엇보다 영화 <시>에 있어 형식상 가장 매혹적인 장면은 영화의 자기매체성이 출현하는 순간이다. 관객이 영화에 환영적으로 동일시하도록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게 하던 감독이 돌연히 카메라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 갑자기 관객은 낯설음을 느낀다. 영화의 환영성을 균열하는 카메라의 자기반영성은 피사체의 즉자적인 모습 자체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수강생들이 고백하는 장면을 보자. 일반적인 장면들과 달리 거의 평면적인 구도를 택했으며, 관객과 대상이 중간 매개 없이 직접 맞닿을 수 있도록 연출했다. 이는 마치 '시'가 생성되는 '창조 이전의 시간',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를 영화적으로 구현한 듯한 방식이다. 그리하여 수강생들이 고백하는 그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마침내 우주적 순간의 거대한 의미로 팽창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의 자기매체성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내는 연출의 최정점은 미자의 수첩바닥을 카메라가 아주 가깝게 맞닿아 정시하는 장면에서이다. 진행해오던 내러티브를 균열하듯, 혹은 내러티브를 분절하여 강조의 '쉼'을 주는 듯한 이 장면은 3차원의 입체적이고도 환영적인 스크린을 2차원의 평면적 화면으로 돌려놓는데, 이때 영화 속 피사체(대상)는 관객에게 '낯설게'보인다. 본격적인 습작을 시작하는 미자는 순간순간의 영감을 자신의 수첩에 적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일반적인 환영적인 영화라면 풀샷으로 미자가 무엇인가를 수첩에 적어대는 모습을 담아내는 장면 바로 다음, 수첩에 시를 끄적이는 손, 혹은 필기구와 수첩을 함께 담는 클로즈업 장면을 이어 붙일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을 택했다. 풀샷으로 미자가 무엇인가를 적는 모습을 찍은 장면 바로 뒤에 이어 붙인 것은 바로 그 수첩의 여백과 미자가 손수 끄적인 글귀 그 자체였다.

관객으로 하여금 3차원의 환영적 세계로 몰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2차원의 평면적 장면으로 '낯설게' 만드는 이 연출은 카메라의 물질성 자체를 환기시키려는 방식이다. 관객이 대상을 '시각'적으로 '관조'하게 하던 카메라는 자신의 장치성을 솔직히 고백함으로써 관객이 대상을 '촉각'적으로 직접 '체험'하게 한다. 이제 관객은 감독의 특권적 시선으로 통제된 환영적인 이야기와 동질화된 의미를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 그 본연의 존재를 주체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생성되는 다양한 감정들을 체험하게 된다. 수첩에 절실하게 새겨진 까만 글자와 하얀 여백의 종이라는 물질성을 촉각하는 순간은 바로 '시'가 찾아오는 낯설고도 즉자적인 사물의 세계, 즉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를 만나는 순간의 감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감독의 특권적 시각이라는 자기중심성 개입이 없는, 관객과 피사체가 직접적으로 만나는 직관적 순간이다. 또한 '실재(들뢰즈의 realite)'의 감각에 가 닿게 하려는 고안이기도 하다. 마치 미니멀리즘 미학에서 추구하는 사물의 즉자적 실재성과 같이 사물 그 자체에만 집중하게 하도록 말이다. 감독의 특권적 시점으로 통합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원초적이고도 날 것 그대로의 이미지를 촉각하는 순간, 드디어 관객은 지각의 해방을 얻는다.

내러티브의 팽팽한 긴장을 끊은 균열의 틈으로 튀어나오는 존재 그 자체, 바로 그것을 '보는' 것에서 핼 포스트가 말한 '실재의 귀환'이 일어난다. 이 균열의 틈에서 빚어지는 무한한 떨림은 불안한 것이기는 하나, 무한하고도 창조적인 사유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그 떨림은 우리 두뇌 속에서 하나의 특권화된 이성으로 인해 통제받는 것이 아니라, 피부 그 자체를 찢고 들어와 마침내 우리 온 몸을 해방시키는 감각이다. 이 창조적 사유의 출발은 진정한 주체성의 모습을 찾는 들뢰즈의 기획과 가까이 닿아있다. 베르토프가 '영화적 눈(kino-eye)'이라 하며 "세계의 아무 지점에서, 아무런 시간적 순서에도 상관없이 서로에게 연결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은 영화가 바로 이와 같은 사물의 즉자적 체계를 드러낼 수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인간의 눈은 이성 때문에 특권적 시점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 눈에 의해 대상은 단 하나의 특권화된 이미지만 갖는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베르토프가 역설했듯이 영화라는 매체는 자기중심성 없는 '외적인 눈'에 의한 관점이며, 그 눈은 사물들 각각 '그 자체 안'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눈과 같은 자기중심적인 시각의 것이 아닌 대상 본연의 즉자성을 찾아내고, 그럼으로써 인간의 지각을 자유롭게 해방하려고 했던 베르토프의 영화적 기획은 바로 이 영화 <시>에서 반갑게 조우한다.



6. 능동적 관객의 출현

이 영화의 형식적 균열과 자기매체성은 영화의 내용을 겉돌지 않고 큰 둘레로 감싸 안는다. 영화의 형식적 특징과 매체성이 사물의 즉자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이창동감독은 희진사건 또한 즉자적으로 바라 '보기'를, 그리고 영화라는 장치자체도 그러한 방식으로 '보기'를 강권한다. 섣불리 주체의 자기중심적인 관점으로 대상을 왜곡하거나 실용과 효용의 이기심으로 문제를 봉합해버리지 말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것을 감독은 간절히 원한다. 그러한 방식으로 이 영화의 형식은 내용과 깊숙이 매개되어 있다. 영화는 '동일시'에 이어진 '거리두기', 또한 영화장치의 매체성이 드러나는 '낯설게 하기'라는 '보기'들의 방식으로 관객의 관람태도를 변화시키고, 마침내 관객의 지각까지도 해방시켰다. 그리하여 감독은 누가 주체이고 누가 대상이라 경계지울 수 없는 능동적 관객의 출현을 원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변화된 관객인 사회적 주체들이 다시 이 세상을 새롭게 변혁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마치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를 꿈꾸듯 말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영화 <시>는 기존의 이창동감독의 영화가 그래왔듯이 영화적 동일시와 그로인한 환영성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그러나 별다른 미학적 기법 없는 사실적인 영화스타일에 매몰되어왔던 그의 영화가 맞이한 '형식적 균열과 영화매체성'은 앞으로 그의 영화창작에 많은 진화를 가져올 징후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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