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스페셜] 김기진 지역사회부장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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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피해자들의 '힘겨운 전쟁'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달 24일 경남 합천군 합천읍 영창리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뒤뜰에 있는 위령각에서 원폭피해 1세대들이 위패를 향해 절을 하고 있다. 윤민호 프리랜서 yunmino@naver.com

부산에서 자동차로 1시간30분 떨어진 그곳엔, 전혀 다른 삶이 있다. 뼈와 살이 분리되고 열 손가락이 한데 엉켜 붙는 저주의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잔인한 운명을 대물림까지 한 한 맺힌 목숨들이, 지난 65년이 그러했듯이, 오늘도 어제처럼 또 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24일 오후 찾아간 경남 합천의 들판은 인적이 드물었다. 황강의 굽은 물길은 무심했고, 훌쩍 커버린 하늘도 구름사이로 푸른빛만 더할 뿐 가을을 말하기엔 너무나 황량했다.

합천군 합천읍 영창리 황강 인근에 자리한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은 명절 직후라 그런지 한적했다. 복지관 2층 유리창 너머로 허리 굽은 노인들의 눈길만 어른거릴 뿐 시간조차 멈춘 듯 정적이 가득했다. 이곳은 대한적십자사 산하 특수복지시설로 원폭 1세대들을 위한 요양시설이다. '1세대'란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을 때 목숨을 건진 한국인 생존자에 붙은 수식어다. 피폭된 한국인 7만 명 중 60%가량이 합천 사람들이었다.

1세대 위한 요양시설 절대 부족… 대기자만 200명
위패 모셔진 분들 대부분 보상 한 푼 못 받고 사망
피해자 보호 특별법안 '순위' 밀린다며 처리 외면


이 복지관은 1996년 10월 개관 당시 65세 이상을 수용하려 했지만 희망자가 너무 많아 70세 이상만 돌보고 있다. 그런데도 대기자 수가 200명이 넘는다.

"지금 신청하면 15년 뒤에나 들어올 수 있어요. 이런 시골에서 노인이 제때 약 챙겨 먹을 수 있는 곳이 여기 말고 어디 있겠어요? 이곳에 오시면 다들 건강이 좋아지세요. 여기 계신 분들은 그나마 다행인 경우지요."

"1세대가 고령이다 보니 20년 뒤에는 생존자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김광혜 복지과장은 안타까워했다. 현재 최고령자는 100세 할머니.

복지회관 앞마당에는 비석이 하나 있다. 비석명은 '평화의 비문'.'이국에서 피폭을 당하신 분들의 괴로움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여기에 평화의 불을 점화합니다. 부디 이 불을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2006년 8월 이곳에 비석을 세운 이는 원폭피해자를 돕는 민간모임인 태양회 이사장 다카하시 고준(高橋公純)이다. 복지회관 뒤뜰에 있는 위령각도 일본인인 그가 세웠고, 위령각 내 위패 964위도 손수 만들었다.

"964명 중에 900명은 보상 한 푼 받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어요. 남의 나라에 끌려가 원폭을 당하고, 고국에 돌아와서도 외면 속에 병마에 시달리다 죽었으니, 이렇게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위패 앞에 향을 꽂던 사단법인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 심진태(69) 전 지부장은 기가 막혔던지 헛웃음을 쳤다. 심 전 지부장은 원폭피해자 실태조사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한국 정부의 무관심과 6년째 원폭피해자특별법안 처리를 미루고 있는 국회의 무성의를 성토했다.

"요즘 방사성 물질이 조금만 누출돼도 온 나라가 법석을 떨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핵'을 통째 뒤집어 쓴 사람들이에요. 국회에 가면 법안에 순서가 있다고 말을 하는데, 사안의 경중과 시급성을 따져야지, 도대체 무슨 번호 타령인지 이해가 안돼요."

심 전 지부장의 승용차를 타고 합천읍 농업기술센터 옆 '합천평화의 집'으로 향했다. 좀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던 그는 가볼 데가 있다며 차를 돌렸다. 도착한 곳은 합천리에 있는 합천청소년문화의 집. 이 건물의 입구 벽면에는 '일본 핵금회의(核禁會議)에서 기증한 성금으로 건립됨. 1973년 12월'이란 글귀가 남아 있었다. 한때 원폭진료소였음을 말해주는 문구였다.

"건물을 수리하면서 글자 위에다 시멘트를 바르려던 걸 막아 이렇게 남은 겁니다. 차가 드물었던 당시 일본인이 앰뷸런스를 한 대 기증했는데 원폭피해자들을 실어 나르느라 온 합천을 누볐지요. 지금보다 그때가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3월 문을 연 원폭2세들의 쉼터인 합천평화의 집은 작은 2층 건물의 1층에 세 들어 있다. 시설이라야 손바닥만 한 방 3칸과 부엌 겸 사무 공간이 전부. 평화의 집에 도착해 보니 부엌 중간에 놓인 탁자에 원폭피해자들을 위해 일하는 활동가와 원폭1세대 등 10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이들은 원폭2세 전문요양시설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달 22일부터 모금운동(땅 한 평 사기 운동)에 들어갔다. 목표 금액은 2억 원. 합천 외곽으로 빠져나가면 3.3㎡에 5만 원 정도하는데 먼저 부지(1만3000여㎡·약 4천 평)를 마련한 뒤 요양시설을 짓는 게 목표다. 그동안 알음알음으로 약 2천300㎡(약 700평)의 땅을 살 수 있는 돈이 모였다.

"2세대 중에는 혼자서는 생활이 힘든 중증장애인이 많습니다. 1세대가 모두 돌아가시고 나면 그들을 누가 돌보겠습니까? 서로 의지하며 살 공간이 정말 급합니다."

합천평화의 집 전 소장 혜진 스님은 "2세대는 전국적으로 1만 명이 넘고 희소 질병을 앓고 있는 환우가 2천300명에 이른다"면서 국가차원의 대책이 시급함을 강조했다.

"다행히 최근 정부에서 예산 지원을 적극 검토하고 있습니다. 경남도 역시 긍정적입니다. 다만 합천군이 고민인데, 재정자립도가 낮으니 힘이야 들겠지만 누구보다 앞장서서 원폭피해자를 챙겨야 할 당사자이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원폭1세대인 김봉대(74) 씨는 "합천군은 원폭2세 문제가 '특별법'으로 처리할 일이라고 말하는데, 법안이 언제 처리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고, 또 법안 내용에서 2세대 문제가 제외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까지 나오는 터라 답답하기 그지없다"고 토로했다. 김 씨는 2003년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조직하고 원폭2세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다 2005년 5월 숨진 김형률의 아버지이다. kkj99@busan.com

△후원문의 : 합천평화의 집 (055)934-0301.

△후원계좌 : 농협 301-0063-8703-21 예금주 : 아름다운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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