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현대판 세자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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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세자책봉은 매우 민감한 정치적 이벤트였다. 왕비와 후궁들 사이에 태어난 많은 자식들 중에 누구를 세자로 앉히느냐에 따라 차기 권력 구도가 판가름나기 때문이었다. 세자는 왕비 소생 중 '장자 세습'이 원칙이지만, 정치 상황이나 임금의 성향에 따라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형제의 난으로 등극한 태종이나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은 3남이었다.

명나라와 사대 관계에 있던 조선은 세자책봉 시 명나라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처음에는 통보만 하면 되는 통과의례 정도로 여겨졌으나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 조선을 도와준 뒤에는 세자책봉에 대한 명의 '심사'가 엄격해졌다. 후궁 소생의 차남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선조는 의인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공빈 김 씨 소생의 광해군을 세자로 발탁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해 왜적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장남 임해군 대신 위기관리 능력이 출중하다고 판단해 광해군을 선택한 것. 하지만 명은 장남이 아니라는 이유로 세자책봉 승인을 미뤘다. 선조의 급사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 사절단을 보내자 명은 "왜 승인받지 못한 차남이 즉위했느냐"며 걸고 넘어졌다. 명은 수차례 진상조사단을 파견했다. 광해군은 그 때마다 거액의 뇌물을 주고 칙사들을 구슬려야 했다.(배상열 '아무도 조선을 모른다')

조선의 이 같은 사대외교를 자주적인 실리외교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근 중국을 방문하면서 3남 김정은을 대동했는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중국으로부터 권력세습을 추인 받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대판 세자책봉이라 할 만하다. 폐쇄사회인 북한은 말할 것도 없지만 'G2'(미국 중국)를 지향하면서도 종주국이라도 되는 양 행세하는 중국의 태도는 퇴행적이다.

윤현주 논설위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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