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애써 모른 체했던 삶 드러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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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나는 여기가 좋다'로 수상 소설가 한창훈

소설가 한창훈씨의 눈에는 외진 곳의 삶이 도드라지게 보인다. 엄연히 존재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문학이고, 또한 참다움이라고 그는 여긴다.

소설집 '나는 여기가 좋다'(문학동네·2009)로 제26회 요산문학상 수상자에 선정된 소설가 한창훈씨를 전남 순천의 한 복판인 순천역에서 만났다. 때마침 "거문도에서 뭍으로 나올 일이 있었다"며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훤칠한 덩치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녔음에도 알 수 없는 우울이 보였다. 털털한 옷차림에서는 갯내음 섞인 자유로움이 흩날렸다.


바다와 섬에 그리움 가진 사람들
아픈 삶 속 희망 어루만지고 싶어

상상력보다 눈앞의 현실이 먼저
그래서 작가에게 변방의 시선 중요



-섬에서 태어났고, 경향 각지를 돌았고, 소설가로 살고 있습니다. 40대 중반 치곤 삶의 이력이 유난하군요.

△전남 여수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거문도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거기서 보고 배운 것이 여전히 내 삶에 가장 큰 영향력입니다. 삶의 곡절을 다소 겪었지만 지금 거문도에 정착해 고기 잡으며 글쓰고 있습니다. 이런 변경의 삶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도 학력, 학력을 외쳐대는 세상에 성질이 나서 오기로 대학 진학했어요. 소설가가 된 연유는 다소 엉뚱했습니다. 놀아도 욕을 덜 먹을 직업, 투자가 가장 적게 들어갈 직업을 생각해보니 소설가가 딱이겠다 싶었죠. 대학 졸업 뒤 신춘문예에 당선됐어요. 아 참, 스무 살 때 부산에서 1년 남짓 살아 본 기억이 떠오릅니다. 공부 좀 해볼까해서 갔던 것인데, 그 대신 술 깨나 먹었습니다.

-이번 소설집은 어떤 내용입니까.

△작중 인물들은 바다와 섬에 대한 본능적 그리움을 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장이 안 좋아 배를 팔아야 하는 상황에서 이제 떠나겠다고 선언하는 늙은 아내를 차마 붙잡지 못한 채 표주박 같은 인생 앞에서 가슴 막막해 하고('나는 여기가 좋다'), 아버지에게 등 떠밀려 육지로 나갔다가 결국 고향인 섬과 바다를 잊지 못해 다시 돌아오고 맙니다('아버지와 아들'). 사겠다는 사람마저 인수를 포기해 크고 튼튼한 배를 폐선시킬 수밖에 없고('섬에서 자전거 타기'), 사춘기 시절부터 어선에 올라 파도 속으로 날아가버린 친구에 대한 죄의식을 마음에 묻고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바람이 전하는 말')입니다. 그래도 벗어날 수 없는 곳이 바다입니다. 저는 이들을 어루만지고 싶은 거예요. 단편 '밤눈' '올 라인 네코'에서 보듯 이들의 아픈 삶에는 낙천과 희망이 함께 어른거립니다.

-한국소설을 어떻게 보십니까.

△행동반경이 짧은 소설들이 난무합니다. 개인의 문제에 몰입하고 정체성 탐구에만 매달리는 풍경입니다. 상상력보다 더 먼저인 것이 현실 아닙니까. 작가들도 다양한 분야, 여러 공간에 분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한쪽에 몰려 있는 겁니다. 거칠고 불편한 것도 겪어봐야지요. 그래서 주변부의 삶이 중요합니다. 변경은 이제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독자들은 도시인들이고 도시의 삶이 대개 소설적 대상이 됩니다. 인터넷이 세상의 전부인 시대로 보입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도 우리가 애써 모른 체 해온 삶들이 엄연하게 존재합니다. 저는 이런 걸 드러내고 싶은 겁니다. 동시대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왜냐구요? 그런 삶이 있으니까요.

-등단 이래 이번 소설집까지 주변부의 삶에 줄곧 천착하고 있습니다.

△섬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섬이 다였고, 삶 그 자체였습니다. 할머니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숙연해져요. 한낱 섬자락에 사는 외로운 이들이지만 그 삶에 말할 수 없는 어떤 깊이감이 느껴집니다. 이 낱낱의 삶들을 언어와 문자로 기록하지 않으면 점점 사라집니다. 그것을 기록해야 합니다.

저로서는 이런 결정들이 중요합니다. 옳다고 생각한 것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성격이 있어요. 기질이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하는 것은 죽어도 하기 싫거든요. 동료작가들이 안하니까 저라도 해야지요.

-이야기꾼으로서의 입담과 특유의 재치, 풍부한 비유의 언어가 돋보입니다.

△타인의 삶을 쓰려면 무엇보다 이야기꾼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변방의 언어를 배우고 익히고 거기에 젖어든 몸입니다. 도시의 삶이 잃어버린 것이 유머와 미소일 텐데, 변방의 언어에는 풍성한 위트와 해학이 존재합니다. 욕설과 육두문자는 변방이 지닌 언어의 풍성한 창고로 보입니다.

질박한 사투리를 제 문학언어의 큰 특징으로 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투리는 물리적 공간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에요. 말의 액센트가 소설의 완성도나 감동을 온전히 담보하는 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이문구 선생의 경우처럼 다채로운 비유의 언어가 소중하다는 생각입니다.

-대양의 상상력도 중요하다고 주장하시던데요.

△사실 지난해 이맘 때 부산일보에 간 적이 있습니다. '요산 김정한 선생 탄생 100주년' 관련 문학세미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륙의 상상력과 서사성의 회복에만 목소리를 높이더군요. 이제 북방이 아니라 남쪽으로 시선을 둡시다. 해양에 대한 인식을 확장할 때라고 봅니다.

해방 이후 바다에 종사한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의 삶, 그 날 것의 생생한 보고서를 개인적인 일로 치부해버리기에는 안타까운 게 너무 많아요. 그들의 언어를 찾는 일을 부산 같은 도시에서 먼저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요산 선생에 대한 생각과 수상 소감은.

△요상문학상은 역사와 무게감에서 여타의 문학상 중에서도 가치가 높은 상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숱한 선배 작가들이 탔던 상입니다. 따라서 저로서는 이 상이 주는 중압감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한창훈' 같은 작가에게 이 상이 돌아간 것을 무척 의미있게 받아들입니다. 저를 직접 가리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삶을 껴안고 붙들어 파고드는 작가, 자기 아픔을 넘어 사회적 비참함에 대해 말하는 작가가 줄어드는 마당에, 인간의 삶에 접근하고 외롭게 탐구하고 쓰려고 노력하는 작가들을 요산문학상이 놓치지 않고 잘 찾아내 격려해주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김건수 기자 kswoo333@busan.com



■ 소설가 한창훈은

전남 여수와 제주도 중간 지점에 위치한, 다도해의 최남단 섬인 거문도에서 1963년 태어났다.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성장기를 보냈다. 이후 대전으로 와 한남대학교를 졸업한 뒤 1992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닻'이 당선돼 등단했다.

첫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1996)를 비롯해 '가던 새 본다'(1998),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2001), '청춘가를 불러요'(2005), '나는 여기가 좋다'(2009)까지 5권의 소설집을 냈다. 장편소설로는 '홍합'(1998)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2003)가 있다.

이밖에 청소년 장편소설인 '열 여섯의 섬', 어린이 책으로 '검은 섬의 전설', '제주선비 구사일생 표류기', 기행문 '바다도 가끔은 섬의 그림자를 들여다 본다', '깊고 푸른 바다를 보았지'(공저)를 냈고, 최근 첫 산문집으로 '한창훈의 향연'을 출간했다. 1997년 대산창작기금을 받았고, 1998년 제3회 한겨레문학상, 2007년 제3회 제비꽃서민소설상, 2009년 제4회 허균문학작가상을 받았다.

2002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젊은작가포럼 위원장, 2003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현재 '대양을 향하는 작가들'의 대표를 맡아 대양적 상상력 확산에 주력하고 있고, 고향 거문도에서 고기를 잡으며 글을 쓰는 일에 몰두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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