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여라! 추억으로] 부산 강서구 강동동 '제도체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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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붓으로 동네이름 쓴 '난닝구'가 유니폼"

지난 15일 주민 등 1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49회 친선체육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제도체육회와 제도청년연합회 회원 등이 "제도리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경남 김해군 가락면 제도리' 사람들은 해마다 8월이 되면 가슴이 뛴다. 매년 광복절인 15일에 삼광초등에서 '광복절 기념 제도인 친선체육대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한갓 체육대회때문에 마음이 설렌다고?'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맘때쯤 되면 객지에 나가있는 고향 사람들에게서 전화가 와요. 올해도 대회를 하냐구요. 행사를 여는 날이면 인근 도로가 꽉 막혀 엉망이 됩니다." 제도인 체육대회를 주최하는 제도체육회 안길준(62) 회장의 말이다.

광복 기쁨 표현한 게 행사 시초

올해는 8개 마을 1천여명 참가


사실 행정지도에 '경남 김해군 가락면 제도리'는 없다. 지난 1978년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제도리는 부산으로 편입돼 강서구 강동동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제도리 사람들은 단체명에 여전히 제도리라는 이름을 쓴다. 행정상으로는 강동동으로 변했지만 제도리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대부동, 천자도, 전양, 수봉도, 중곡, 상곡, 송백도, 평위도 8개 마을로 이뤄진 '제도리'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제도리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객지에 나간 고향사람들을 해마다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하는게 바로 광복절 기념 제도인 친선체육대회다. 광복 직후부터 시작한 이 대회는 올해로 49회를 맞았다. 사정상 행사를 치르지 못하고 건너뛴 해를 포함할 경우 실제로는 50년을 훨씬 넘었다고 옥성근(68) 전 제도체육회 회장은 말한다.

제도리는 농사를 많이 짓는 지역이다. 일제 강점기 때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제도리 주민들은 괴로움을 많이 당했다. 농사를 지어봐야 일제에 다 뺏겼다는 것. 광복이 되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난 기쁨을 체육대회로 표시한게 행사의 시초였다고 제도체육회 측은 설명한다. 초창기에는 친일파 주민들이 깡패를 동원해서 행사를 방해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에는 다 가난했기 때문에 대회를 치를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해마다 각 마을이 돌아가면서 대회를 주관했다고 한다. 제도리청년회 초대회장이었던 김대명씨의 부인이 직접 수를 놓아 우승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제도체육회에서 행사를 모두 준비한다. 예나 지금이나 대회가 다가오면 8개 마을은 행사 준비에 분위기가 들뜬다고 한다.

"옛날에는 마을대표 선수를 뽑아 보름정도 합숙훈련을 했어요. 다른 마을 사람들이 정탐을 올까봐 나룻배를 타고 다른 지역 학교에 가서 몰래 연습한 적도 있습니다." 고2때부터 축구대표로 출전했다는 안 회장이 웃으면서 말한다. 선수들이 연습을 하면 집집마다 쌀이나 반찬을 조금씩 내 선수들을 지원했다.

기억에 남는 일도 적지 않다. 제도청년연합회 김용우(51) 회장은 1980년대 이전만 해도 유니폼을 사 입을 형편이 안되는 시절이어서 '난닝구'에 붓으로 동네이름을 써넣어 유니폼 삼아 입기도 했다며 웃었다. "축구화가 없어 고무신을 새끼줄로 묶고 뛰었죠. 연습할 때 축구공을 못 구해 짚을 둥글게 묶거나 돼지 오줌통에 바람을 넣어 공 대신 차기도 했습니다."

"대회 당일에는 마을마다 돼지 한마리씩은 잡아요. 8월이면 농사일로 바쁜 철이지만 제도리 사람들은 이날만큼은 아무도 일을 하지 않습니다." 제도체육회 심용호(50) 총무의 설명이다. 올해 대회에는 8개 마을 주민들과 타지에서 아이들 손을 잡고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까지 1천여명이 참가했다.

"세월이 흘러 제도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나면 언젠가는 이 행사가 없어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도리 사람들은 일심동체가 돼서 고향의 전통인 체육대회를 굳건히 지켜나갈 겁니다."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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