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태권의 문학 뒤집기] ⑤ 허황옥은 원조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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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 능보다 높은 곳 위치 아들 두 명도 허씨 성 물려받아

일러스트=류지혜 기자 birdy@

작년까지만 해도 고구려, 발해 등의 건국과 관련된 남성 영웅을 그린 사극이 주류를 이루다가 올해 들어 천추태후를 비롯해 선덕여왕 등의 여걸들이 사극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추세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상 여권운동 혹은 페미니스트의 원조는 누구일까? 모르긴 해도 허황옥일 것 같다. 허황옥이 김수로왕의 부인이었으며,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였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일부에서는 인도에서 가야까지가 거리가 얼마인데 그게 말이 되느냐고 의문을 품기도 하지만, 보주태후 허씨지릉(普州太后許氏之陵)이라 새겨진 비문에 실마리가 있다. 허황옥의 능에도 발견되는 아유타국의 문장인 쌍어문(雙魚紋)이 중국의 보주지방-지금의 쓰촨성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며, 아유타국이 멸망한 뒤 그곳으로 이주를 해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곳에서 가야로 시집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수로왕보다 10년 먼저 세상을 떠난 허황옥이
유언으로 자식이 자신의 가문을 잇도록 김수로왕에게
부탁을 했고 그것을 김수로왕이 들어준 것이다


설화에는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꽤 신비롭게 만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하여간 두 사람이 혼인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일단 전제를 하자. 두 사람이 결혼하여 열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었는데, 아들 중 2명에게 김해 김 씨가 아닌 허 씨 성을 물려 준 것이다.

전하는 얘기로는 두 사람의 금실이 좋았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성을 나누어 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수로왕보다 10년 먼저 세상을 떠난 허황옥이 유언으로 자신의 가문을 잇도록 김수로왕에게 부탁을 했고, 그것을 김수로왕이 들어준 것이다. 왕족의 피는 타고 났지만 이미 왕국은 멸망하고,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 나서 혈통조차 잇기 어려운 자신의 처지를 깊이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해서 자식 일부에게 자신의 성씨라도 물려주어 명맥을 유지하고자 했던, 허황옥의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게 아닐까.

허황옥이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음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능의 위치다. 김수로 왕릉은 김해 시내의 평지인 서상동에 위치하고 있고, 허황옥의 능은 거리가 꽤 떨어진 구지봉 주변의 경사진 언덕배기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날의 상식으로 볼 때 부부의 능은 나란히 쓰는 것이 상식이다. 당대에는 어떤 관습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능을 나란히 쓰기 곤란하면 하다못해 주변에라도 쓰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터. 그런데 거리를 두고 능을 쓰는 건 그렇다 치고, 능이 자리한 위치는 왜 다르냐 이 말이다.

이 또한 허황옥이 고집을 부렸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혼란했던 왕국의 초창기, 아내 이전에 정치적 동지로서 가야왕국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헌신했는데, 자리가 잡히자 당신이 내게조차 카리스마를…. 명색이 왕인데, 남들의 이목도 있고 하니 이해는 해. 그렇지만 죽은 뒤에까지 내게 왕처럼 군림하는 건 못 참아. 당신이 평생 동안 내 위에서 군림하고 떵떵거리며 살아왔으니까, 죽어서라도 내가 당신보다 높은 곳에 묻히고 싶어. 양심이 있으면 마지막 부탁은 꼭 들어 줘.' 그렇게 된 건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 식의 떼(?)를 부린 허황옥도 만만치 않지만 그 부탁을 들어 준 수로왕 또한 대단하지 않은가.

소설가 monster-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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