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5> 대조영이 거처한 왕궁은 어디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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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정산 고분군 남쪽 영승유적 도성터 정설

1980년부터 시작된,소수민족 역사를 중국사로 만드는 정책은 앞으로 더욱 조용히 치밀하고 강력하게 진행될 것이다. 최근 중국은 장춘 동계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창바이산(長白山),즉 백두산을 형상화한 영상물을 내보냈다. 동북공정은 학술(역사)프로젝트라기보다는 정치·전략프로젝트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총 51개 기초연구 과제 중 32개가 변경 및 국경문제에 집중돼 있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연구재단','동북아역사재단'이 만들어졌고,최근의 인기 사극들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작된 것이다. 사극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고구려사에서 소외되어 말갈사나 중국사로 간주되기도 하던 발해사가 '대조영'이라는 사극을 통해 되살아나고 있어 정말 다행이다.

대조영이 첫 수도로 삼은 것은 구국(舊國) 둔화지역이었다. 이곳은 그가 처음 나라를 세우기 위해 출발했던 영주(營州;朝陽)로부터 1천여 리 떨어진 곳이다. 천문령에서는 동북으로 좀 올라간 산악지역이다. 그런데 구국은 대조영이 첫 도읍지로 삼고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잠시 거쳐간 지역으로 간주되면서 발해 5경 즉 상경,중경,서경,동경,남경에 포함시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발해 수도가,중경현덕부인 지린성(吉林省) 화롱현(和龍縣) 시구청(西古城) 근방으로 옮기는 742년경까지,이곳에 약 44년 이상 자리했다는 것을 결코 짧게 볼 수는 없다. 왕으로 보아도 고왕(高王,698~719) 대조영(大祚榮)에 이어 그 아들 무왕(武王,719~737) 대무예(大武藝)가 이곳에서 재위했고,심지어 제3대 문왕(文王,737~793) 대흠무(大欽茂)도 초기까지 이곳을 도성으로 삼았다.

그러면 과연 어느 곳이 발해 왕이 거처하던 도성 역할을 하였는가? 그점이 쟁점이다. 44년간 왕이 거처했다면 그 규모가 어떠하더라도 적어도 궁성과 행정관서는 있어야 한다. 고고학적으로 기와나 주춧돌을 통해 그 규모를 짐작하곤 한다. 이렇게 해서 지목된 곳이 처음에는 둔화시에 있는 오동성(敖東城)터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요나라 시기의 유물들이 나오고 그 성곽 짜임새 등에서 발해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육정산 고분군 남쪽에 인접한 영승(永勝)유적을 도성터로 강력하게 인정하고 있다. 궁터와 같은 정연한 주춧돌 등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서쪽 5㎞ 지점에 발해 최초 산성인 동모산이 있는 점을 들어 도성터로 보는 것이다. 동모산이 오루하(대석하)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있는 것은 적의 예상 공격 지점이 적어도 목단강 서쪽이기 때문인데 오동성은 똑 같이 서쪽에 있어서 방어상 문제가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발해가 당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로 전환하게 된 시기는 당에서 측천무후가 사망하고 705년 중종이 즉위한 뒤였다. 당 조정은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무마했고,대조영도 아들 대문예(大門藝)를 당에 보내어 입시(入侍)하도록 하였다. 그 뒤 당은 대조영에 대해서 외교적 승인행위인 책봉례를 거치려 하였으나 거란과 돌궐의 침입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711년 돌궐의 묵철(默)이 당에 화친을 바라면서 신하로 복종할 것을 표시하자,당 예종(睿宗,710~712 재위)은 이 시기를 이용하여 713년 낭장(郎將) 최흔(崔)을 발해에 파견하여 양국 관계가 개선될 수 있었다.


▲ 발해의 첫 궁궐터 영승유적. 가운데 산이 대조영이 처음 나라를 세운 동모산이다. 이전에는 발해 첫 궁터를 오동성터(작은 사진)로 여겼다. 현재 오동성터와 관련해서는 영승유적에서 옮겨와 도성으로 삼은 곳이라는 견해 등이 제기돼 있다.


그는 발해(당시는 진국振國)에 들어와서 대조영에게 발해군왕(渤海郡王),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의 책봉을 전달하였고,그 아들 대무예(후에 2대 무왕)에게는 계루군왕(桂婁郡王)의 책봉도 전달하고 돌아갔는데 모두가 구국을 수도로 하고 있던 때였다. 아직 '발해국'이 아닌 '발해군'으로 인정되는 한계가 있었지만 당으로선 발해 건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까지 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발해의 요청이 아닌 당에서 먼저 사신을 파견했던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중국은 발해 대조영이 홀한주도독의 책봉을 받았다고 해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외교적 승인 행위의 관행으로 행해지고 있던 책봉례를 이렇게 보는 데 대해서는 일본을 비롯한 동양사학계에서조차도 인정하고 있지 않는다. 이렇다면 백제나 신라,왜도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발해의 자주성은 대조영의 시호(諡號) 즉 죽은 후에 부르는 호칭을 고왕(高王)이라 하였다고 '신당서'가 전하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대조영은 연호도 '천통(天統)'이라 하였던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다른 왕들도 대체로 연호와 시호를 사용하였다고 함은 정치적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발해의 자주성 내지 국호 사용 시기에 대하여 '신당서'가 "(대조영이 책봉을 받았던 713년으로부터)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로만 불렀다"고 전하는 부분이 문제가 되고 있다. 발해라는 국호가 과연 중국의 주장처럼 당나라로부터 하사(下賜) 받은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주어는 당나라로서 그들이 일방적으로 발해를 '말갈'이라 깔보아 부르다가 이때로부터 정식 국호를 따라 '발해'라고 불렀다는 것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발해는 건국 때 '떨쳐 퍼진다'는 뜻의 '진국(振國)'이었다가 어느 시점에 와서 '발해'로 고쳐불렀고,그 시기는 적어도 당의 책봉시기 이전이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한규철/경성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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