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3> 대조영·이해고의 숙명 '천문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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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추격군 물리치고 가자 둔화로!

물론 걸걸중상 등 대조영 집안도 이진충의 난에 깊이 간여했을 거라는 시각이 일반적이기에 둘은 영주에서도 알고 지냈다고 볼 수 있다.

TV 사극이 그린 것처럼 대조영이 평양에서 활동하다가 영주로 갔을까 하는 점은 의문이다. 설령 대조영이 평양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활약의 주인공은 아버지 걸걸중상이었다. 대조영의 사망 연대는 719년으로 분명하다. 고구려 멸망이 668년 그리고 발해 건국이 698년이니 그가 70세에 죽었다면 649년생으로 영주로 갈 때에는 20세 정도였고 발해를 중국 지린성(吉林省) 둔화(敦化)지역에서 건국할 당시는 50세였다.

그런데 구당서가 발해 건국을 이끈 지도자를 대조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신당서'(1044~1060편찬)는 그 아버지 걸걸중상에서 대조영으로 그 임무가 바뀌게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당서 내용이 걸걸중상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는 등 풍부한 기록으로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발해 건국을 위해 영주를 탈출할 때까지 고구려 부흥세력의 중심은 대조영의 아버지였다는 것이다. 물론 대조영은 충분히 아버지의 뜻을 대행할 정도로 나이나 경륜을 갖춘 지도자였기에 발해 건국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대조영과 이해고가 일전을 벌였던 천문령을 연상케 하는 장백삼림 지구 고개. 화띠엔과 찡유(靖宇)에서 장백현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발해 건국 과정에 함께하였던 사람 중에는 말갈 추장 걸사비우가 등장한다. 사극에서는 대조영의 부하로 등장하지만 실제로 그는 대조영의 아버지와 같은 항렬 정도의 장수였다. '신당서'는 이 부분을 자세히 전한다. "사리(舍利)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남은 종족과 동쪽으로 달아나… 성벽을 쌓고 수비를 굳혔다. (측천)무후가 걸사비우를 책봉하여 허국공(許國公)을 삼고 걸걸중상으로 진국공(震國公)을 삼아 죄를 용서하였다. 그러나 비우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무후가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索仇)를 시켜 쳐 죽였다… 조영은 곧 비우의 무리를 합병하여 지역이 (당나라와)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불렀다."

천무후가 발해 건국 만류를 위해 걸걸중상을 진국공으로,그리고 걸사비우를 허국공으로 삼아 회유하였다고 전한다. 책봉 순서도 걸걸중상보다 걸사비우가 먼저였던 것으로 보아 그 세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항복한 장수 이해고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이해고가 그 뒤 대조영에게 패배함에도 불구하고 측천무후의 신임을 두텁게 입고 상까지 받았던 것은 거물급 걸사비우를 제거했던 공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해의 건국 과정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은 천문령전투였다. 대조영이 추격해온 당나라 장수 이해고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기에 발해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해고는 수차례 출병하였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있을 정도로 발해 건국을 집요하게 방해했지만 결국에는 아무 성과없이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휘파허 유역 동쪽의 화띠엔시에 있는 소밀성 발해성터 유적. 화띠엔시는 대조영이 천문령을 넘어 건국길에 올랐던 길목이자 거란과 교통하였던 영주도의 길목에 있는 도시이다.


천문령이 어디인가 하는 점은 많은 견해들이 있으나 대체로 현재 요하 동쪽의 훈허(渾河)와 휘파허(輝發河)의 분수령인 지린하따링(吉林哈達嶺)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곳은 후일 발해에서 거란으로 가는 영주도(營州道)의 길목이었다. 대조영은 바로 이곳 휘파허 부근에서 추격해 오던 이해고를 대파하고 발해 건국에 성공하였다. 이해고가 겨우 "몸을 빠져나가(脫身)" 요서지방으로 되돌아갔다고 전한다. 이곳에서의 승리가 없었던들 고구려 유민들의 꿈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천문령으로 짐작되는 하따링을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랴오웬(遼源)시,그리고 동쪽 휘파허 유역 도시로는 메이허코우(梅河口),류허(柳河),휘난(輝南),판스(磐石),화띠엔(樺甸)시 등이 있다. 화띠엔시에는 국가급 소밀성(蘇密城) 발해성터가 남아 있다.

당시의 국제정세도 대조영에게는 유리했다. '구당서'가 "이 때 마침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에게 항복하였으므로 길이 막혀서 측천(무후)도 그들을 토벌할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성(푸순)에 있었던 안동도호부도 유명무실하였다. 아울러 신라의 당 축출전쟁으로 신당간에도 대결적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보다도 발해 건국의 성공 원인은 천문령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했다는 것과 고구려 유민들을 잘 조직하였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필자가 천문령 근방을 처음 답사한 것은 1994년 11월이었다. 휘파허 하류의 송화호(松花湖) 근방에 위치한 지린(吉林)시에서 관련 학자들을 방문하고 부여·고구려 및 청동기 유적으로 유명한 동단산(東團山) 및 서단산(西團山) 유적에 이어 휘파허 유역을 거쳐 장백조선족 자치현을 답사하였다. 장백현은 발해 영광탑이 있어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고 천문령을 체험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화띠엔 소밀성 유적 이후부터는 역시 난코스였다. 산악과 겨울이라는 악조건으로 인해 4륜 구동 차량을 타지 않고는 갈 수가 없었다. 당시로서는 중간에 마적단들이라도 나올 그런 공포감이 스며드는 코스였다. 발해사 학자로는 처음으로 이 코스를 접해 본 감동과 함께 대조영이 이런 곳을 뚫고 발해 건국을 성공시켰구나 하는 감회가 새삼 뭉클하였던 곳이다.

한규철/경성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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