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또하나의 비극, 美기밀문서로 본 '민간인 학살'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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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여성에도 무차별 총질

1950년 10월 12일 서울에서 어린아이들이 엄마의 등에 업힌채 형무소로 끌려가는 모습. 이 사진은 국제적십자단이 촬영한 것으로 본보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적십자 본부 기록보관소에서 찾아낸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정부의 학살행위는 미군 정보보고서에 'wholesale execution'(대량 학살)이란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매우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학살은 형무소 수감자와 보도연맹원에 대한 것처럼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이뤄진 경우도 있지만,인민군 점령지역을 재탈환하는 과정에서는 인민군을 도와줬다는 소위 '부역'을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행해졌으며,심지어 북한지역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사냥'(communist hunting)식으로 진행돼 미군들조차 이를 막기에 진땀을 흘릴 정도였다.

한국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행위 가운데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것 중 하나가 서울 홍제리 집단총살 사건이다. 이 사건은 수많은 정보보고서를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미국 영국 등 서방 언론에서도 집중적으로 다뤄져 국제적으로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으나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50년 12월 주한 미 대사관과 미 국무부 등의 보고서 등 각종 기록에 따르면,50년 12월 15일 오전 7시30분 서울 북쪽 홍제리에서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 경비병들이 수감자 34명을 사살했다.

모두 5명의 경비병들은 전날 미리 파둔 구덩이에 수감자들을 무릎 꿇린 뒤 사격을 시작했다. 경비병 수가 적다보니 구덩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총을 쏘아야 했고 목숨이 쉽게 끊어지지 않는 수감자에겐 집중사격을 가했다. 공포에 질린 여자들은 비명을 질렀고 남자 수감자들도 살려달라며 울부짖었다.

이곳은 영국군 29여단 관할지역이어서 모든 장면이 영국 군인에 의해 목격됐다.

윌리엄 힐더(William Hilder)와 렌 캐일번(Len Calebourne) 등 영국 군인들은 '여자 2명과 8살,13살 된 어린이 2명이 함께 사살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보고했다.

'이건 학살이야! 우리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싸우고 있는 거야?' 충격을 받은 영국 군인들은 그날 아침도 먹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내일 이곳에서 35명을 또 사살할 것'이라고 말했던 경비병들이 실제로 다음 날 해뜨기가 무섭게 수감자들을 끌고 나타났던 것이다.

참다 못한 영국 군인들은 경비병들을 강제로 무장해제시킨 뒤 구덩이도 되묻게 했다.

분노한 영국군의 거센 항의로 사건이 확대되자 유엔한국통일재건위원단(UNCURK)은 사실 확인을 위해 시신 발굴에 들어갔다. 그 결과,현장에선 전날 사살된 34명이 아닌 수백구의 시신이 쏟아져 나왔고 여자 시신도 상당수 발견됐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찾아내지 못했으며,한국 정부는 어린 아이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부인했다. 이후 학살 책임자였던 국군 대위는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이승만은 학살 중단을 지시했다.

하지만 어린 아이가 학살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경우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제네바협정 준수여부를 감독했던 국제적십자단은 50년 12월 18일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는 엄마 등에 업혀 있던 어린 아이들을 목격한 뒤 이승만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이에 따라 어린이 200명이 형무소에서 구출돼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당시 많은 외국 언론들은 어린 아이들이 엄마의 등에 업혀 학살현장에 함께 끌려갔다고 고발했다. 미 군사고문단이 정리한 외국 언론의 보도 내용 가운데는 한 형무소 관계자의 충격적인 발언이 등장한다.

'누가 키울 것이냐? 빨갱이 자식들은 자라면 다 빨갱이가 된다.'

집단 학살된 시신들이 미군에 의해 무더기로 발견되기도 했다.

50년 10월초 경남 마산에 있던 미 보병 25사단 병참중대 장교 로저 스나그래스(Roger Snodgrass)는 부대 근처 4개의 동굴에서 300~500구의 시신을 찾아냈다. 묘지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그는 시신들을 잘 매장했는데도 부패하는 냄새가 진동을 하자 그 진원지를 찾던 중 문제의 동굴을 발견했다. 스나그래스는 '한국 정부가 한국 내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찾아내 죽인 사실을 알게 됐다'고 증언했다.

북한지역에서는 이른바 '공산주의자 사냥'이 벌어졌다.

미군 정보보고서에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은 사리원 학살. 1950년 12월 8일 북한 황해도 사리원 기차역 근처에서 한국 경찰이 정치범 포로 56명을 사살한 이 사건은 유엔사령부에 그 전말이 보고됐다.

보고서에 따르면,한국 경찰은 기차역 근처에서 재판도 없이 포로 56명을 총살했다. 경찰은 미 1군단 헌병사령관 레이몬드 리건(Raymond Regan) 중령에 의해 무장 해제됐으며,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17명은 미군에 의해 남쪽으로 가는 화물열차에 태워졌다.

보고서에는 '화물열차는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 포로들로 발 디딜 틈 조차 없었고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고 기록돼있다. 또 1950년 12월 12일 유엔사령부가 미 8군에 보낸 공문에는 한국 경찰이 황해도 신막에서 주민 21명을 총살하려는 것을 영국군이 저지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공문에 따르면 신막의 얼어붙은 강변에서 경찰이 주민을 사살하려 하자 영국 45 야전연대 마틴 홀(Martin Hall) 대위가 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홀 대위의 연락을 받은 여단본부 버틀러 윌리암(Butler Williams) 대위는 경찰 책임자를 찾아가 '학살을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총으로 쏘아죽이겠다'고 위협,주민들을 풀어줬다. 다음날 경찰에 붙잡혀 있던 100여명이 추가로 풀려났다.

1950년 10월 19일자 미군 G-3(작전참모부)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기록돼 있다.

'한국 정부가 정치범을 대량 학살하고 있으며 특히 여성과 어린 아이들까지 학살되고 있다. 이는 한국을 위해 싸우고 있는 유엔군 전체에 불신을 줄 수 있다.'

실제 한국 정부의 무차별적인 학살행위에 대해 당시 외국 언론의 비난이 빗발쳤다. 루마니아,체코 등 공산국가는 말 할 것도 없고 미국 영국 등 서방 언론들까지 이를 맹렬히 비난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50년 11월 3일자 1면에 서울 홍제리 학살과 관련,'8개월 된 아이를 둔 여자가 총살됐다'면서 '유엔군은 북한의 침략을 받은 한국인들이 진정한 민주 정부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싸우고 있는데 한국은 민주정부가 해서는 안 될 학살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시카고 트리뷴도 같은 해 11월 9일 '한국 정부의 대량학살 피해자 중에는 여자가 포함돼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 런던타임스는 같은 해 10월 25일 '유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대와 살인이 계속되고 있다'고 했으며,로이터-AAP 특파원은 '한국 경찰이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고 있으며 미군이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김기진기자 kkj99@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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