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경제 야사] <24> 인물편 김지태 ② 광복 이후 기업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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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견직'불하 '삼화고무'인수

1947년 범일동 김지태의 집앞에서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앞줄 가운데) 장군과 기념사진을 찍은 재부청년지도자들. 지 장군 오른쪽 옆이 김지태.

광복을 맞고 정부가 수립되자 그동안 일본인들이 소유하던 정부 귀속재산인 기업체의 처리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몇몇 중화학공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은 민간에게 불하됐다.

김지태는 부산 귀속재산관리인회 이사장직을 맡은 사실이 있고,또 그의 3대 주력기업 중 조선견직과 삼화고무가 귀속 기업체일 뿐만 아니라 그 뒤 창설한 한국생사도 산하 16개 제사공장 중 동방제사와 대한생사가 귀속 기업체였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후일담을 들어보면 조선견직 이외의 기업체는 다른 사람이 불하받은 것을 인수한 것이고 조선견직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견직의 원래 명칭은 아사히견직이었다. 부전동과 거제동에 있던 종업원 300명 규모의 이 회사는 군수용 피복 등을 생산했는데 광복 후 일본인 사장이 떠나자 종업원들이 자체 운영에 들어갔다. 그러나 광복 직후의 혼란과 회사 내부의 좌우익 사상 대립으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종업원 대표들은 김지태를 찾아와서 회사관리권 인수를 간청했고 경남도 광공업국장까지 나서서 그를 설득했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회사관리권을 맡게 된 김지태는 거액을 들여 회사를 확장,400명이던 종업원을 1천800명으로 늘렸다. 1949년 회사 명칭을 조선견직으로 바꾸었으며 2년 뒤 그 회사를 불하받았다는 것이다.

삼화고무㈜는 일제 때 그 회사 대구영업소장을 지낸 김예준이 1951년 불하받은 것을 1958년 김지태가 인수했다. 이 회사가 경영난을 벗어나 본궤도에 오른 것은 케미컬 슈즈 등 신제품 개발과 해외수출길이 열린 1960년대 중반부터였다.

김지태가 부산지역 기업인에서 전국적 기업인으로 발돋움한 것은 한국생사를 창업하면서부터다. 한국생사의 모태는 1946년에 설립한 대동산업이었다. 이 회사는 조선견직의 원료 조달과 생산된 견직물 수출을 주로 하는 일종의 무역회사였다.

그 후 대동산업은 밀양 진주 진해 등지에 있는 제사공장을 인수하고 강원도 춘성에 60만정보의 뽕나무밭을 조성하여 관리했는데 1949년에는 회사를 서울로 이전,자본금 1억원의 이화상사㈜로 새출발했다. 전국에 걸쳐 설립 또는 인수한 생사회사가 16개사로 늘어나자 1955년 회사 명칭을 한국생사㈜로 바꿨는데 이때부터는 그야말로 실크계의 세계적인 회사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 시중에서는 진담반 농담반으로 세계 최대의 실크황제는 중국 마오쩌둥이고 그 다음은 일본에 있는 편창제사,그리고 세 번째가 한국생사의 김지태라 했을 정도다.

그러던 김지태에게 위기가 닥쳤다. 조선방직 이사로 있던 그가 1950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조방낙면(朝紡落綿) 사건에 휘말린 것이다. 내용인즉 조방에서 생산되는 군수용 광목에 불량품을 섞어 이적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 연임 반대에 앞장섰던 야당 국회의원 김지태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었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었다. 김지태에 의하면 그 사건 때문에 그에게 넘어오기로 되어 있던 조방 관리권이 강일배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시련은 5·16혁명 직후에 불어닥쳤다. 혁명정부가 제정한 부정축재관리법에 따라 김지태는 남산헌병대에 수감됐고 환수금 5억원을 납부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1970년대 후반 일본의 자국 생사산업 보호를 위한 수입규제와 값싼 중국 생사의 영향,그리고 박정희 정권 시절 과도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따른 출혈수출은 그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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