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최해군 나의 교유록]소설가 김말봉과 그 곁사람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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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金末峰과 한무숙

앞장에서 말한 김말봉에 대해 미흡한 점이 있어 보다 구체적인 언급이 필요할까 해 '세계문예대사전' 에서 김말봉에 대해 적은 글을 살폈다.

그는 1901년 부산 영주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늘날의 동구 좌천동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선교사가 경영하던 부산진 일신여학교(뒤에 동래로 이전하여 동래여자중·고등학교가 됨)에 다녔다.

일신여학교에 다닐 때는 박순천(朴順天·기장출신·제2,4,5,6대 국회의원)과 동기였다. 그 사실은 '동구향토지'에 '나의 학창시절'이란 제목으로 박순천이 밝히고 있는데 그 글에 의하면 김말봉이 일본어를 국어라 하여 가르치는 그 일본어 여선생을 골려주기에 가장 앞장섰다 한다.

그는 일신여학교를 나와서는 서울의 정신여학교에 편입,졸업을 하고는 일본으로 가서 도오지사(同志社)대학 영문과를 마치고 돌아와서 1929년 중외일보(中外日報) 기자가 되었다.그때 중외일보 사장은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백산은 부산 동광동에서 백산상회를 경영하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대주고 독립운동가를 규합하는 한편 육영사업을 크게 일으키다가 일제 검찰의 추적이 계속 치밀해져오자 백산상회를 해산하고는 민족의 계몽과 민족의 의지를 고양하기 위해 중외일보를 인수했다.

김말봉은 1932년에는 '보옥(步玉)'이란 필명으로 중앙일보(1931년 경영자가 바뀌면서 '중외일보'에서 '중앙일보'로 이름을 바꿈)에 단편 '망명녀(亡命女)'가 당선된 직후 단편 '고행(苦行)''편지' 등을 발표하다가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소설 '밀림(密林)'을 연재했다. 이 '밀림'을 집필한 것은 서울에서 내려온 뒤의 부산 좌천동 자택에서였다.

'밀림'의 삽화는 당시 부산여자고등학교 4학년이었던 한무숙(韓戊淑)이 그렸는데 그 횟수는 242회나 되었다. 앞의 장에서 말한 소설가 한무숙은 처음은 화가 지망생으로 그림공부를 하였다. 아무리 그림공부를 하여도 17세 학생이 날마다 화필 기교를 바꾸어 가야할 성인 연재소설의 삽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무숙은 김말봉의 삽화를 그리는 동안 화가의 꿈이 소설가로 변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밀림'의 삽화를 그리기 위해 한무숙이 김말봉에게서 원고를 받고,원고의 내용에 따라 그린 그림을 김말봉에게 전하는 장소가 바로 광복동 에덴다방이었다. 원고와 삽화는 동아일보 지국을 통해 서울 본사로 올라갔다. 그 당시 '에덴다방'으로 알려진 곳은 동아일보 기자를 하던 강대홍(姜大洪)이 사서 '제일다방'으로 이름을 고쳤지만,옛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어 다시 주인이 바뀌면서 '에덴'으로 되돌아 갔다.

향토사학자 박원표(朴元杓)는 '부산의 고금'에서 '에덴다방에는 여류작가 고(故) 김말봉 여사와 지금 중앙문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부산 출생 한무숙 여사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하고 있다. 필자는 오래 전에 이 에덴다방을 알기 위해 그 자리를 찾았더니 삼계탕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1937년에는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했는데 그 '찔레꽃'도 부산의 초량 연하동 자택에서 집필한 작품이다. 이 집은 그가 1933년 결혼한 남편과 사별한 뒤 재혼한 사업가의 집이었다.

이 '찔레꽃' 연재가 끝난 뒤는 절필 상태가 되었다.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이 강해지면서 신문 잡지의 우리말 발간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문 연재소설로 대중소설을 개척한 그는 광복이 될 때까지 부산에서 살았다.

광복을 보자 서울로 자리를 옮겨 '화려한 지옥'을 발표하고,6·25전쟁 때 부산으로 되돌아와서는 많은 피난 문인들을 도왔다.

전후인 1954년에는 '푸른 날개'를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1956년에는 조선일보에 '생명'을 연재했는데 이 '생명'을 그의 대표작으로 삼고 있다. 그 이외 '태양의 권속''별들의 고향''바람의 향연''파초의 꿈''찬란한 독배' 등 많은 장편을 책으로 꾸며내고 단편선집으로 '꽃과 뱀'을 출간했다.

부산의 여류 소설가로는 맨 처음인 그는 남성작가들과 겨룸으로써 여류 소설가로서 지위를 드높였다.

그는 1962년 2월 9일 폐암으로 6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필자가 처음 만난 5년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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