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연맹원 대학살] ⑩ 1960년 유족회 활동
지역마다 위령제 '명예회복' 시도
60년 6월25일 경남 진영 합동장례식에는 1만여명이 참여,진영역에서 설창고개까지 10리길이 장례인파로 가득찼다.
보도연맹 학살이 있은지 10년만인 1960년 4.19가 터졌다.학살로 혈육을 잃고 더구나 그 유골이 지척에 암매장되어 있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동안 애만 태웠던 유족들은 이승만 대통령까지 물러났으니 이제는 억울함을 세상에 알려 명예를 회복해야 겠다며 유족회를 결성,유골발굴에 나섰다.
유족회 결성은 학살의 피해가 가장 컸던 경남.북지역이 주축이 됐다.
경남의 경우 동래를 비롯해 김해와 창원일부를 포함한 금창,마산,창원,밀양,함양 등지서 잇따라 유족회가 결성됐고 60년 8월28일에는 부산상공회의소에서 이를 포괄한 '경남유족회' 결성대회가 개최됐다.
경북에서도 코발트광산에서 대학살을 당한 경산과 경주,대구 등에서 유족회가 구성돼 60년 6월15일 대구상공회의소에서 '경북유족회'가 발족됐다.
그리고 같은해 10월20일 서울 종로의 전 자유당중앙당부 회의실에 경남.북 각 시군 유족회 대표 50여명이 모여 '전국유족회'를 출범시키고 그 회장에 마산유족회 대표인 노현섭(당시 41세)씨를 선임했다.
유족회들은 지역별로 합동위령제를 지내는 한편 국회에 탄원서를 내는 등 명예회복을 시도했다.
금창유족회는 유골 300여구를 발굴,진영역 앞에서 유족 등 1만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설창리고개에 안치했다.
동래유족회도 기장과 회동수원지 인근 등지서 모두 700여구(신고된 것은 360명)의 유골을 발굴해 부산 연제구 거제동 화지산 능선에 합동묘지를 만들고 위령제를 지내는 등 각 지역마다 합동위령제가 잇따랐다.
국회도 진상조사특위를 구성,지역별로 조사반을 파견해 피해조사에 나섰고 동래 등 일부 지역에 대해선 합동위령제를 위한 지원금까지 지급했다.유족들은 비록 가족이 억울하게 죽었지만 '빨갱이'라는 누명만은 벗게 됐다며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망령은 그들을 그냥 두지 않았으니 합동위령제가 있은지 채 1년도 안돼 5.16쿠데타가 일어났던 것이다.
5.16세력은 반공의 기치를 들고 유족들을 잡아 들이기 시작했다.
합동묘지는 모두 파헤쳐져 유골은 불살라졌고 비석은 박살이 났다.
화지산 합동묘지에 있던 높이 1m20㎝,폭 90㎝ 위령비는 나흘동안 계속된 망치질에 가루로 변해 거제동 철길에 뿌려졌다.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이라는 소급법이 만들어졌다.소급기간이 무려 3년6개월에 달했다.
더구나 현재 부산.경남유족회 회장인 송철순(69)씨 등 일부 유족들중 이 법이 공포되기 수개월전 이미 검거된 상태였다.
미리 잡아놓고 소급법을 만들어 기소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유족들에게 적용된 죄명은 동법 제6조에 규정된 '특수반국가행위'였다.
한마디로 유골발굴이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인 북측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8개 유족회 간부 27명이 재판에 회부돼 사형,무기 등 중형이 구형됐고,경상남북도유족회 이모(당시 49세)씨에 대해서는 사형이,그리고 12명에 대해 징역 15년에서 5년이 선고됐다.15년이 3명,10년이 4명이다.
쿠데타세력은 특히 유족을 검거하면서 관련 기록을 남김없이 압수해 갔다.
당시 동래유족회 총무였던 송씨는 '소급법이 공포되기 2개월여전 붙잡혀 갈때 경찰이 들이닥쳐 집의 천장까지 모두 뜯어내며 기록들을 모조리 압수했다'고 말했다.
당시 검찰이 유족들을 기소하면서 증거물로 내세운 증거목록을 보면 발굴일지와 유골수집철,(피해자)조사명부,사진,(학살자)고발장 등 학살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들이 많다.
그러나 이같은 기록들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본보가 국회에서 피해자신고서 등 일부를 찾아내기는 했지만 이마저 경북지역에서 제출한 것만 있을 뿐이다.
판결문이 영구보존대상이니 관련 증거물도 첨부자료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정부 당국에서 일체 공개를 하지 않고 있으니 그 존재여부조차 알 길이 없다.
김기진기자 kkj99@pusa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