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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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韓 정권수립과정 내막 재현



그 동안 부산일보에 연재된 「레베데프 비망록」은 해방직후 북한 정권 수립과정의 내막을 소상히 밝혀준다는 점에서 학계는 물론 온 국민의 관심을 물기에 충분했다. 분단 반세기가 지났지만 당시 북한정권 수립과정에 대한 연구는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적 제약 때문에, 다른 한편으론 관련자료의 부족 때문에 제대로 진척되지 못한 형편이다. 그런 마당에 당시 북한정권 수립의 핵심 주역인 소군정의 레베데프가 남긴 비망록을 부산일보가 발굴, 공개한 것은 의미 깊은 일이다. 당시에 대한 연구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일 수 있는 귀중한 계기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50여 년 전의 역사를 생생하게 재현시켜 주는 기회를 제공한 까닭이다.

「레베데프 비망록」을 통해 우리는 새삼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북한정권 수립에 대한 소련의 구상이 신뢰할 만한 자료를 통해 분명하게 밝혀졌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우리는 소련이 제2차 미소공위를 추진하면서 남한의 친일세력으로 구성된 극우파를 배제하고 적어도 남북한의 좌파가 3분의 2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됨으로써 이 같은 소련의 구상이 일단 좌절되었을 때 그 대안은 남한 단독정권에 대항하는 북한 단독정권의 수립이었음을 비망록은 밝혀주고 있다. 그러고 소군정이 북한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반 조치들을 치밀하게 준비해 나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1948년 초에 그 시행이 검토된 「전조선 인민 대표자대회」구상, 또한 남한에서 남북협상운동이 활발해지자 빠르게 추진된 「남북연석회의」 등은 바로 이러한 준비들의 실례이다.

둘째, 소련측의 대한정책 결정 과정의 메커니즘이 자세히 밝혀졌다는 점이다. 그 메커니즘은 대체로 金日成-레베데프-스티코프-모스크바 등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주역은 스티코프 대장과 레베데프 소장이다. 곧, 소련의 세계정책 속에서 입안된 대한정책의 기본적인 훈령은 스티코프와 레베데프를 통해 북한 현지에서 구체화되고 북한 현지의 요구 또한 이들을 통해 모스크바로 전달되는 체계다. 이 점에서 2차 대전 이후의 국제정세를 전제로 할 때 북한정권수립은 세계적 냉전의 심화와 긴밀히 연결되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정책결정의 메커니즘 속에서 북한의 金日成은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행사했는가. 비망록은 거의 대부분의 실질적 조치들이 金日成과 레베데프의 「긴밀한 협의」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답하고 있다. 그것은 金日成 또한 소당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시사해준다. 오히려 그는 소당국과의 긴밀한 연계 속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셋째, 비망록이 보여주고 있는 주목할만한 사실은 북한정권수립에 대한 북한측 내부의 반대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북조선 청우당은 예상보다 훨씬 큰 세력이었고 특히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총선안에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음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 시점에서도 분단을 우려하여 남북한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는 요구는 비록 공개적으로 추진된 것은 아니지만 암암리에 북한지역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모스크바 결정 직후에 조만식의 북조선 민주당이 신탁통치 반대 태도로 인해 탄압받은 것처럼 북조선 청우당 또한 탄압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우리의 흥미를 끄는 또 한가지 사실은 남북연석회의 당시 金枓奉이 金九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소군정의 의심을 샀던 점이다. 소군정은 북로당 위원장이었던 金枓奉에게도 완전한 신뢰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청우당 문제 및 金枓奉 문제가 함축하는 것은 당시 북한에는 그 힘의 크기와 관계없이 「민족주의적 경향」이 존재했고 소당국은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넷째, 가장 우리의 관심을 끄는 비망록의 내용은 남북협상 곧, 남북연석회의에 관한 것이다. 비망록 내용은 소당국이 치밀한 계획 아래 남북연석 회의를 추진했고 그것은 북한측 노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金九 및 金奎植을 평양에 불러들이면서도 이들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했음도 보여준다. 아무튼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됨으로써 그들의 시도는 일단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이 金九 및 金奎植의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그들의 북행은 일방적으로 이용만 당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비망록 내용을 세밀히 살펴보면 그 정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물론 당시 남북한에서 단독 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진행되고 있었고 남북협상 노력이 그러한 대세를 역전시킬 수 없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金九 金奎植은 북한측 의도와는 따로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남북요인회담까지 이끌어냈던 것이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金奎植이 끝까지 북측과 실질적 협상을 시도했다는 점도 두드러진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민족의 주체적인 힘에 의한 민족통일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고 특히 평화통일 방법의 원형이 된 것은 명백하다.

분단시대 50주년이 되는 오늘 비망록이 우리에게 던지는 역사적 교훈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분단 나아가 전쟁으로 까지 이어진 역사적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 민족의 각 정치세력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일 것이다. 외세와의 결탁을 통한 민족분열이 아니라 민족 내부의 단합을 통한 통일이 우리의 올바른 길임을 비망록은 가르쳐주고 있다. 이것이 통일한국의 전망을 확보해야 하는 분단 반세기의 시점에서 50년 동안 이끼 낀 「레베데프 비망록」이 우리 민족에게 들려주는 역사적 웅변이다. 역사란 주체적 힘을 자각한 민족만이 아로새기는 전진의 기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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