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데프 비망록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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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시위계획 밀고로 거사 실패



2월 26일

(다음은 북조선청우당의 상황임.)

△2월 14일 천도교는 운동을 일으키라는 편지를 남한으로부터 받았다.

△2월 21일 교회지도자 李敦化 자택에서 회의.

△2월 26일 아침에 金達鉉이 김일성에게 모든 것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천도교

△10명의 사람들이 천도교 여러 지역에 파견됐다?신의주 4명 평남 3명 원산 1명 평양 2명 명산 덕천 등. 지휘자가 준비되다.

3월 3일

?허가이 통보에 의하면 (유엔)소총회 결정에 대한 북조선 지도층 분위기는 부정적.

?남조선 현대일보 2월 25일자?북한에서 탈출한 단체들이 남한 선거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그 누구도 한국분단을 원치 않는다. 모스크바결정에 찬성. 남북한 민주적 단체 협의회나 대회를 소집할 것. (남북한 민주적 단체들과 협의회나 대회는 남북연석회의 구상을 의미하는 듯함.)

?한국헌법을 가결하기 위한 인민회의 정기총회가 3월에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인민회의 이름으로 이에 대한 공표는 10월 15일 예정임.

?남한에서 선거실시에 관한 소총회 결정에 주민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정보를 줄 것.

?천도교와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조만간 분리이탈이 있을 것이다. 명칭은 남겨둘 필요가 있으나 우파는 축출해야 한다.

△대중작업에 대한 지령을 받을 것.

△무엇으로 천도교 활동을 폭로할 것인가. 그들의 강령 및 강령관련 내용들을 보고 정관에 위배되는 사실을 폭로할 것.

3월 5일

?라디오에서는 김규식이 입법의원 의장직을 사퇴했다고 보도했다. (남한만의 총선을 결정한 2월 26일자 유엔소총회 결정이 알려지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내 단선 지지의원들은 남한총선촉진안을 가결했다. 이에 반대하여 입법의원 의장인 김규식은 사표를 제출했다. 이 사표는 3월 2일 수리됐다.)

3월 6일

?김일성

△2월 15일 남한으로부터 서신을 지닌 여인이 출현했다.

△19명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북한 전역에서 모두 1백 23명을 체포했다.

△모두 1백 72명. 이 중 60명은 천도교.

△李根燮 현재 억류 중. 1886년생, 1908년 천도교. 李敦和.

△남쪽은 김달현과 함께 金起田을 당 대표로 추대하라고 제안하고 있다.

△남한 공작원 김형구가 돈을 받으러 도착했다. 李康國은 그를 남로당 내 자기사람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가 청우당 출신 남한공작원임이 드러났다(이강국을 조사할 것).

(남로당 출신인 이강국은 1946년 9월 미군정에 의해 검거령이 내려지자 북한으로 올라갔다. 이강국은 당시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1946년 10월 김형구는 남한으로 도망쳤다.

김기전은 도망친 김형구와 함께 남한으로부터 왔었다.

△김달현은 이근섭을 석방하라고 요청한다. 그는 매일 이 문제를 제기한다. 이근섭을 계속 구금하고 이돈화를 체포할 것인가. 아니면 그를 석방할 것인가. 왜냐하면 천도교내 다수파를 붕괴시킬 만반의 준비가 아직 돼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달현이 제안한 것. 김기전을 천도교 총무원장으로 임명할 것. 그러면 그는 김달현의 경쟁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결정

1. 김달현을 존중해서 이근섭을 석방시킬 것.

2. 회의 진행 때까지 극단적 조치로 김기전을 구속할 것.

(이상은 북한의 蘇군정을 반대하고 유엔감시하 총선거를 받아들이도록 1948년 3·1절 기념일을 기해 평양에서 시위를 전개하라는 남쪽 천도교 중앙 지령에 의해 시도된 「3·1 재현운동」 거사계획이 북한당국에 적발되면서 야기됐던 상황이다. 아마도 김일성이 사건 전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레베데프가 이를 메모한 듯하다.)

(다음은 남한만의 총선을 결정한 2월 26일자 유엔소총회 결정에 대한 북한측 대응에 관한 일정임.)

?3월 9일=민전 중앙위원회 회의 후 김일성 발언 방송으로(보도할 것).

?3월 10일=신문보도

?3월 14일=소총회 결정에 대한 도시 항의 집회. 거기에서 각계각층 발언 대표로 金枓奉 金達鉉 崔庸健이 연설한다.

3월 9일

?스티코프에게

△남한에 관한 정보들. 선거를 위한 준비가 강화되고 있다. 선거법은 1947년 8월에 채택된 것이다.

△북한에 관해서. 민전 중앙위원회 회의가 개최됐다. 김일성이 보고했다. 보고는 열광적으로 채택됐다. 김두봉과 최용건 김달현의 열정적인 발언이 있었다. 라디오로 방송됐다. 내일은 신문에 보도될 것이다. 어떻게 보고를 전달할 것인가(12페이지).

(3월 9일 개최된 북조선민전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김일성은 그동안 유엔에서 진행된 한국문제 처리 과정을 밝히면서 그 책임을 미국과 남한 측에 돌리는 한편, 유엔소총회의 결정에 대응하여 북한 역시 선거를 실시, 최고입법기관을 구성할 것임을 밝혔다.)

△김구에 관해서. 그의 이름을 이승만과 함께 한국 민족반역자로 상기시키는 구호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당시 남한에서는 김구 및 김규식 등이 남북협상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김일성 및 김두봉에 이를 제안하는 편지를 보내놓고 있었다. 그러나 위 내용으로 보아 김구에 대한 蘇당국 판단이 아직 분명하게 결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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