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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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3週 휴회 뒤 공동위 사실상 종결 제안



10월 14일

소련대표단을 비방한 데 대해 하지에게 항의함.

남로당이 1947년 8월 15일에 일으키기 위해 폭동을 조직했다는 수도관구경찰청장 성명서가 신문에 실렸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 사건을 조직했던 것처럼 상세히 썼다. 스티코프는 하지에게 항의하고 이를 신문에 발표했다.

10월 18일

3주간 휴회 뒤 오늘 공위회의가 재개됐다. 1948년초 한국에서 소련군과 미군 동시철수에 관한 제의를 우리 대표단이 제출한 9월 26일에 마지막 회의가 있었다. (9월 26일 소련은 미국측의 한국문제 유엔 이관에 대응하여 미소 양군이 철수한 가운데 한국문제는 한국인 스스로에게 맡기자는 제안을 했다.)

끝으로 미국대표단은 공동위원회 일을 잠시 중지할 것을 제안했다. 양 대표단은 각각 점령군 본부에서 머물며 유엔이 요구할 원조에 대해 도움을 줄 준비를 갖추자는 것이다. 중앙에 보고했다. (미국대표단 제안은 사실상 미소공위를 종결 짓자는 것이었다.) 지시를 기다린다. 언제 회답이 올까?

10월 19일

아침에 몰로토프로부터 답신이 왔다. 브라운에게 보낼 우리 대답이 약간 수정된 채 승인됐다. 평양으로 떠나는 것에 대한 허가가 났다. 내일 월요일에 열차를 불러 화요일에 평양으로 떠날 것을 지시했다. 스티코프 툰킨 그리고 나는 화요일에 열차가 떠난 후 비행기로 출발할 것이다.

내일이면 우리가 서울에 온지 정확히 다섯 달이 된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날이었다. 앞으로 군대의 대과업이 남아있다. 나는 벌써 군대를 그리워한다 .

10월 21일

오전 11시 소련대표단원들을 태운 열차가 서울에서 출발했다. 발라사노프는 기차로 떠났고 블라직이 차장이다. 스티코프 툰킨 나 부관들 그리고 영어 한국어 통역관들은 함께 비행기로 떠났다. 공항은 서울에서 16마일 떨어져 있다. 공항까지 우리는 영예로운 호위를 받으며 갔다. 우리 자동차 앞에는 헌병차와 장갑부대원이 선도했고 그 다음에 우리 자동차와 장갑부대원 헌병차가 뒤를 이었다. 거리 양편에는 소총을 든 무장경찰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 1백m 간격으로 서 있었고 내가 세어보니 시외에만도 2백50명 가량 경찰이 배치됐다.

공항에는 브라운 장군 제이콥스 위원회의 새로운 위원(그는 대령인데 그의 이름을 잊었다)이 우리를 전송했다. 군악대와 의장대가 있었다. 우리는 공항에 12시45분에 도착했다. 이륙은 13시. 15분 동안 잡담할 수 있었다. 정확히 13시에 비행기를 탔다. 13시15분에 이륙하여 50분 뒤에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꽃다발 환영을 받았다. 金日成 金枓奉 崔庸健 등을 필두로 모든 북한지도자들이 나와 있었다. 모두 50명 정도였다. 우리 사령부에서도 모두(코르트코프 샤딘 발다노프 이그나치예프 카프렌 스미로토프장군 등)나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돌아온 것이다. 서울에서 5개월과 하루라는 체류 기간이 끝난 것이다. 지금부터는 여기에서 북한에 관해 생각하고 일할 수 있을 것이다. 17시20분 기차로 도착했다. 모두 다 무사히 잘 도착했다.

10월 26일

북한군사학교 졸업식. 8백60명의 장교가 각지에 보내졌다. 그들은 1년 동안 교육을 받았다. 퍼레이드 솜씨를 보니 교육을 잘 받은 것 같다. 포 사격이 있었는데 1백㎜포 같았다. 잘 차려진 만찬장에는 1천명 이상이 참석했다. 모두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인민위원회 사람들이었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민족군대 맹아가 싹텄다는데 매우 흡족해했다. 장교제복은 훌륭했다. (이날 북조선 중앙보안간부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중앙보안간부학교는 군 초급간부들을 양성하기 위해 1946년 6월 설립된 군사학교이다.)

10월 29일

▲각도 위수사령관 및 군(郡) 대표회의. (북한지역 각도에 주재하는 소련군 위수사령부 사령관들과 소련군 각군책임자 회의임.)

한국 내 상황에 대한 평가. (한국 상황을 미국 및 미국인들의 일반적 상황과 분리시켜 고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동위원회는 한국에 민주주의적인 임시정부를 수립치 못했다. 이 문제는 미국에 의해 유엔에 이관됐다. (유엔에서 심의되고 있는데 어떻게 해결이 날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군대 철수와 관련한 질문이 제기됐는데 우리가 철수한 뒤 한국인들이 민주주의를 방어할 수 있도록 우리가 모든 일을 제대로 했는가. 만일 한국인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민주개혁과 성과를 지켜내는 것은 이러한 개혁의 정당성에 대해서 한국인들이 확신하게 될 때에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군 대표들과 사령관들의 보고를 들어볼 때 북한군 간부들에 대한 정치사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군 지휘관 및 사령관들의 업무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는 인상이 들었다.

위수사령관들과 민정기관원들은 민간정부를 아래에서 위에까지 도입하고자 하는 잘못된 개혁 관념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계급과 계급투쟁에 관하여.

우리 간부들을 단련해야 한다. 남쪽에는 간부들이 반동과 투쟁하면서 단련되고 있다. 북쪽 우리 간부들은 정치적 사상적으로 단련돼야 한다.

11월 1일

저녁때 사냥을 했다. 그저 시간을 보낸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잘 다녀왔다. 휴식을 가졌다.

11월 3일

군부대 소유의 물건 중 손수건이 없다. 옷깃에 댈 천도 없다. (북한주둔 소련군내 물자가 부족함을 알 수 있다.)

오후1시 비행기. 대단하다. 김일성. (아마 김일성이 비행기로 어디로 출발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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