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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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 한국문제 4强國회의 회의안 거부



8월 26일

▲공동성명서 개요에 대해.

미국대표단은 1946년 정기회의에 관한 내용을 보고서에 포함시킬 것을 제안했다. 우리는 단지 1947년부터 포함시키자고 제안했다. 나머지 문제들에 대해서는 개요에 대한 동의가 있었다.

브라운은 각각 대표가 자신들의 보고서를 작성하고 후에 그것들을 정리하자고 제안했다.

8월 29일

이그나치예프로부터 보고. 그는 곡물조달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8월 28일 모두 2만7천9백여t의 곡물(계획의 95%)이 준비됐다.

곡물조달 결과는 나쁘지 않다. 남쪽에서는 경찰력을 이용한 곡물조달로 사정이 더욱 악화됐다.

9월 30일

8월 26일 소련대표단 제안에 대한 미국대표단 답변.

ㅡ협의기관에 대한 소련대표단 제안은 새로운 것이 없다. 다만 신탁을 지지하지 않는 정당을 제외하자는 제안이 있을 뿐이다. 미국대표단이 이 제안에 찬성한다면 그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다.

ㅡ남한 인구는 북한의 배다. 그러므로 동등한 기준에서 참가시키자는 주장에 대해 미국 측은 찬성하지 못하겠다.

(구두협의를 생략하는 대신 자문서 답신안으로 대치하고 임시헌장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 즉각적인 총선거를 통해 전국 입법기관을 구성하자는 8 월 12일자 미국측 제안에 대해 소련측은 8월 26일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로서 남북 동수로 구성되는 자문기관인 전조선임시인민회의 조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소련측은 여전히 임시인민회의 구성에 있어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하는 단체대표를 제외시킨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상 미국측 답변은 8월 26일자 소련측 제안에 대한 거부를 나타내고 있다.)

9월 6일

로베트 원문에 대한 몰로토프의 답변을 받았다. 이것을 한국 신문에 게재해도 되는지 허락을 요청했다.

(미국무장관 대리 로베트는 8월 26일 소련측에 한국문제를 미·소·영·중 4대국 회의에 회부하자는 제안을 했다.)

9월 8일

ㅡ몰로토프에게서 신문게재를 허락하는 편지를 받았다. 9월 9일 한국 신문에 넘길 예정이다. 그러나 좀 늦었다. 한국신문사들은 우리들이 제공한 것이 아닌 라디오에서 발표된 몰로토프의 편지 내용을 신문에 냈다. 우리는 또 늦은 것이다.

(로베트 제안을 거부하는 몰로토프 서신 내용은 이미 9월 8일자 신문에 보도됐다.)

ㅡ나는 영어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지금은 우리의 앞으로의 제안ㅡ북한 인민위원회와 남한 민간정부에 통일 한국정부 창설을 위한 교섭을 위임하자는 것에 미국이 찬성할 경우에 대비하여 준비계획서를 마련하고 있다. 부정적인 상태가 가장 나쁘다. 북한에서는 할 일이 많은데 여기서는 서면계획만 잔뜩 만들고 있다. 가족이 그립다. 가족과 함께 있고 싶다. 알렉은 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어떻게 생활하고 그 기분이 어떠한지 아무 것도 모르고 알 길도 없다.

ㅡ저녁에 스티코프가 코르트코프(북한 주둔 소련군사령관)와 이그나치예프(蘇민정사령부 정치국장)가 서명한 평양에서 보낸 서류 하나를 검토하라고 주었다. 서류에는 「소비에트 민정 구성 계획」이라는 제목이 있었다. 나는 극도로 놀라고 격분했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서류에 서명해서 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제안한 내용

1, 북한 상태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소비에트 민정을 밑에서 위에까지 조직할 필요가 있다.

2, 문제들을 더욱 확실하게 해결하고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측면의 생활에서 구체적인 지도를 할 수 있도록 민정기관에 모든 기능을 부여할 것.

3, 군(郡)부 지휘관직을 없앨 것.

4, 사령부를 개편한다.

ㅡ나는 이 서류를 읽고 매우 실망했다. 그것이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유해한 자료임을 알았다. 내 의견을 체렌치 포미치(스티코프)에게 보고했다. 그는 나의 주장에 동의했다. 나는 이 제안에 대한 비판을 코르트코프에게 암호로 보낼 것을 제안했다.

ㅡ암호 전문에서 그의 무모한 계획에 대해 맹렬하게 비웃었다. 이 제안은 민주화를 진전시키지 않고 모든 권력을 한국에서 빼앗아 소련 민정기관 손아귀에 집중시키자는 제안이다.

남한에서는 실질적으로 권력이 미군정에게 있다. 북쪽에서 권력은 인민위원회에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행정의 역할은 조언자로 귀착돼야 한다.

ㅡ우리는 한번도 한국인들의 삶의 모든 부분을 지배한 적이 없었다. 이러한 임무가 우리 앞에 놓여졌던 적도 없었다. 온갖 비난성 논평으로 이 어리석은 제안 작성자를 맹렬하게 조소했다.

(소련측 북한 관련 정책결정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듯하다. 여기에서는 북한 민정에 대한 소련군 개입을 강화할 것인가 여부를 둘러싸고 코르트코프와 레베데프 사이에 이견이 드러나고 있다.)

ㅡ발렌코가 덕수궁에서 소식을 보내왔다. 오늘 남한 미군정장관인 러취소장이 죽었다고 국기가 내려졌다는 것이다. 그는 뉴욕경찰국장이었다. 지난번 웨디마이어가 왔을 때만 해도 우리는 그가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다. 바로 그날 그는 심장발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바로 오늘 그가 죽었다. 사람 목숨이란 얼마나 짧은 것인가. 러취는 노동혁명운동을 탄압했던 경찰지도부 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 러취는 남한 노동운동을 가차없이 탄압했다. 전형적인 미국 파시즘의 대표자이다. 소련대표단 이름으로 애도의 표시를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9월 13일

어제 말리크(소외무성 차관)로부터 문건 하나를 받았다. 뒤이어 비류조프(소련군 극동사령관)에게서 문건 하나를 받았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흥분시켰다. 내용은 북조선민전 호소문이었다. 첫 번째 안은 우리가 비판하고 새로 쓸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주초에 있었던 일이다. 코르트코프는 그저께 새로운 안을 보내왔다. 첫 번째 案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불충분한 것이었다. 나는 이에 대해 날카롭게 비난했고 스티코프가 서명했다. 그런데 끔찍하게도 어제 저녁 말리크 암호전문은 더 이상 수정을 가하지 말고 이 호소문을 신문에 게재하라는 것이다.

10월 6일

9월 16일에서 10월 4일까지 병으로 평양에 있었다. 2주일간이다. 9월 17일과 9월 36일 마지막 회의에서 미군과 소련군 철수에 관한 소련대표단 제안이 제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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