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데프 비망록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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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대적인 남한좌익 檢束 나서



8월 1일

▲공동위원회 회의

브라운은 양측 모두가 수락할 수 있는 단체들과 공동협의를 수행할 것을 제안했다. (또 한)미국대표단은 독자적으로 남한 우익 정당들과 협의를 할 것이다. 그러한 협의는 공위 협의로서 간주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브라운은 소련측이 협의하고자 하는 남북한 단체들에 대해서는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협의를 시행하고 소련측이 의혹을 품고 있는 남한측 단체들에 대해서는 미국측이 단독으로 협의를 시행하되 그것은 공위협의로 간주해야 한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8월 7일

전보를 받았다. 8월 4~5일사이 서울에서 평양에 도착했다. 오늘 서울로 출발하려 했으나 회의 날짜에 대한 지시도 없이 월요일까지 머물라는 스티코프의 전보를 받았다.

1947년 7월 25일자 미국 대표단 성명서와 1947년 7월 29일자 소련대표단 성명서 발췌문을 공표해야 한다.

8월 12일

▲제53차 공동위원회

-스티코프=소련대표단은 8월 5일 제안을 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지금 처한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브라운=우리는 소련대표단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 양측대표단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료하다. 우리는 새로운 제안을 한다.

1, 구두협의는 더 이상 취해지지 않을 것이며 협의를 위한 문만 열어놓을 것이다.

2, 제2소위원회에 임시헌장과 정강을 마무리 지을 것을 위임할 것. 이 헌장은 어떤 관직을 선거로 선출하고 어떤 관직을 임명할 지를 명시할 것.

3, 국가입법기관 총선거. 선거는 실행돼야 하며 국제감시하에 행해져야 한다. 선거에 관해 세부계획을 준비케 할것.

4, 제3분과위원회에 지시하여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에 임명할 직원 선거만을 준비케 할것-4개국 정부 승인하에.

(이상은 미국측의 새로운 제안으로서 각 정당 사회단체들과 구두협의를 그들이 제출한 자문서 답신으로 대치하고 대신 선거를 통하여 한국인들의 의사를 확인하자는 것이었다. 미국측의 이 제안에 대해 소련측은 모스크바에 지침을 요청했다. 그러나 소련측은 모스크바의 지시가 늦어지는 가운데 남한에서 행해진 좌익에 대한 일대 검거에 대해 항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날 제기된 미국측 제안에 대한 소련측 답변은 28일에야 이뤄졌다.)

8월 20일

▲공동위원회회의

한주 내내 회의가 열리지 않았다. 문서를 검토했다. 불안과 기대의 한주였다.

미국무장관 마샬이 몰로토프 동지에게 보낸 편지. 거기에 대한 우리의 답신 계획. 중앙 (모스크바)에서는 지시가 내려오지 않음. 오늘 회의에서 서울을 비롯한 남한 전체에서 행해지고 있는 좌익박해와 테러에 대한 우리의 성명서가 낭독될 것이다.

(미국무장관 마샬은 蘇외상 몰로토프에게 미소공위 지연과 관련,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진행된 미소공위의 성과를 공동으로 보고토록 하자는 서신을 보낸바 있었다. 소련대표단은 이에 대한 본국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8월 12일에서 20일 사이 4백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그들 중 7명은 공동위원회 협의를 위해서 선발된 인물들이다. 민전, 노동당 중앙위원회, 노동조합, 농민연맹, 여성동맹 등을 비롯한 좌익단체 사무실이 폐쇄됐다. 좌익 성향 신문도 발행되지 못하고 있다.

(남한의 좌파진영은 1947년 8월 15일을 맞이하여 미소공위를·촉진하기 위한 8·15해방 2주년 기념 시민대회」를 대대적으로 치를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와 관련, 미군정은 좌파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전검속을 벌여 4천여명을 체포했다. 사전검속 이유는 좌파진영이 「8·15폭동계획」을 도모했다는 것이었다. 위의 비망록 내용은 바로 이같은 미군정의 단속에 대한 소련측 항의와 관련한 것이다.)

▲남한에서 테러에 대한 소련대표단 성명서

-브라운=소련대표단은 남한내정에 간섭하려고 한다. 공동위원회 임무는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소련대표단은 8월 12일 마샬이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지시가 있는가? 보고할 필요가 있다.

-스티코프=우리는 지시를 받지 않았다.

8월 23일

지시를 받았다. 소연방 원수 명의로 된 몰로토프 외교문서와 우리가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 이것은 시간이 약간 늦었다.

8월 12일 미국인들이 제안을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그들의 요구에 답하지 않았다. 이렇게 긴 시간을 끌게 된 것은 유감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침묵함으로써 여론의 눈에 우리 자신이 스스로 곤란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그나치예프는 소련공업전문대학으로 한국학생을 파견했다는 소식을 전보로 알려왔다. 총1백20명의 학생을 보냈는데 여학생은 14명이다. 노동당원 87명, 민주청년동맹 30명, 무소속 3명.

1947년 8월 24일 오전 10시 출발.

8월 25일

남한에서 수행되고 있는 좌익 민주단체에 대한 체포에 대해 1947년 8월 20일부터 소련대표단이 발표한 성명서에 대한 미국대표단의 성명서. 거기에서 다음과 같이 씌어있음.

1, 남한에서 당신들은 손님이다.

2, 예의를 지켜야 한다.

3, 구두협의는 없다. 따라서 공동위원회 작업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다.

4, 그리고 필요할 때는 한국 활동가들이 초빙될 것이다.

5, 남로당과 민전은·남한 정부와 교류가 없다(그리고 미군사령부에 적의를 품고 있다).

6, 남한을 교란시키기 위해 외부에서 요원을 불러들였다. 공동보고서 작성에 대해 브라운은 8월 20일 마샬장군에게 자신들의 보고서를 보냈다고 통고했다.

제1소위원회에 공동보고서 개요를 작성해 줄 것을 위임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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