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데프 비망록 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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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릴레이식 군중집회로 대표단 전송



5월19일

이른 아침 체렌치 포미치(스티코프를 말함)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로 첫 번째 군용열차를 보내고 내일 모든 대표들을 보내라고 말했다. 나는 13시에 첫 열차를 보냈다.

낮에 스티코프와 툰킨이 도착했다. 대표를 아침에 서울로 파견활 것을 결정했다. 시간은 한 시간 앞당겨졌다. 서울에 5월20일 15시15분에 도착하여 하지(주한미군사령관)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9시에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5월20일

이른 아침 6시에 체렌치가 전화하여 나를 급히 불렀다. 여기에서 나 발라사노프 코르쿠랜크 그리고 나머지 기술진과 비서진은 기차로 가고 그와 툰킨은 비행기로 가기로 결정했다. 밤에 몰로토프(소련 외무상)가 전화로 위원회 업무에 대해 지시했다.

(발라사노프: 소련 주일대사 역임. 제25군 정치고문. 제1, 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소련측 고문으로 참석했다.)

9시에 예정대로 평양을 출발했다. 우리 대표단을 전송하기 위해 많은 단체와 학교 대표가 모여 군중집회를 개최했다. 민주주의의 민족통일전선의 김달현(金達鉉)이 연설했다. 「조선의 브존느이」(내전 당시 유명한 적군 지휘관). 우리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의 콧수염은 「러시아 브존느이」 같았다. 스티코프가 답사를 했다. 아이들이 꽃을 선사했다. 코르트코프 샤닌 그로모프 이그나 치예프 등이 배웅을 나왔다. 모든 것이 엄숙하고 고양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김달현: 북조선 청우당 위원장)

호각이 울리고 디늘카와 작별을 한 뒤 우리는 출발했다. 가는 도중 지나는 역마다 예외 없이 깃발과 손수건을 든 학생들과 마주쳤다. 첫 정차역인 사리원에서 군중대회가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사진과 꽃들이 보였으며 인민위원회 및 정당 대표들이 나와 있었다. 또 다시 꽃 증정이 있었고 10분간 정차. 신원 역에서 다시 군중대회. 소비에트 대표단을 만나기 위해 나온 많은 여성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축사와 꽃의 물결이 일었다. 이러한 일들이 38선까지 계속 됐다.

38선 이후로는 풍경이 아주 달라졌다. 첫 정거장에 기차가 들어서자 경찰이 경계를 폈다. 아무도 기차에 다가서지 못했다. 이러한 광경이 서울까지 계속됐다. 오직 경찰만이 있었다. 기차가 오기만 하면 경찰이 에워쌌다. 지난 해에 비해 경찰의 수가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역마다 오래 머물렀다.

서울역에는 45분이나 늦어 16시에 도착했다. 정거장 플랫폼에는 종군사진사 영화 촬영기사가 있었다. 미국 위원회 측의 일원인 웨커링 장군과 랭던이 마중 나와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3분 정도 서 있었다. 광장에서는 군악대가 행진곡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광장은 도열한 경찰과 미군들 이외에는 텅 비어 있었다.

(랭던: 미군정에 파견된 미국무성 고문. 1946년 3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때 소련대표단은 많은 사람들의 환영 속에서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제2차 미소공위 때에는 별로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우리 앞길을 미군이 탄 장갑차와 지프가 선도했다. 역에서 영사관으로 가는 모든 길에는 경찰이 도열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경찰들은 서로 10~15보 간격으로 서 있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서울에 왔다. 영사관에 도착하자 일류신 47호가 하늘에 보였다. 스티코프가 탄 비행기다. 스티코프는 17시에 영사관에 도착했다.

5월21일

14시에 덕수궁에서 공동위원회 개막행사가 열렸다. 개막식에는 미군 측 장군들과 미국 프랑스 중국 영사들 그리고 우리 측 연락장교들이 참석했다. 군정장관과 군정 각 부처장, 군정 내 조선인들도 참석했다. 스티코프와 하지는 포옹을 나누었다. 또 다시 사진·영화촬영이 있었다.

(제2차 미소공동 위원회는 이날 덕수궁 석조전 회의실에서 개막식을 가졌다.)

5월22일

첫 실무회담. 의사일정을 정했다. 미국 측에서는 위원회에 정당사회단체 대표뿐만 아니라 개별 관련 당사자들도 참석할 수 있게 하자는 제안을 들고 나왔다. (우리는)그들에 포섭된 앞잡이 정당 사회단체들을 제외하고 싶었다. 우리는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도 그 문제에서 손을 뗐다.

이어 미국 측은 이전의 「결정3」에서 정치강령에 대한 구상을 취소하고 장차 수립될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의 권력이양에 관한 새로운 항목을 설정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에게 불리한 정치강령을 의사일정으로부터 제외시키기 위해 그들은 심지어 강령에 관한 의제를 합의한 적이 없다는 술책까지 부렸다. 그들에게 이전 회의기록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1946년 4월27일 회의록 기록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미국 측의 이 수정안은 철회됐다.

(이날 회의에서는 민주주의 각 정당 사회단체와 협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제1분과 위원회, 임시정부 형태 및 구성과 임시헌장 그리고 정강 문제를 다루기 위한 제2분과 위원회, 임시정부 인사임명 및 임시정부 권한을 이관하는 방법에 관한 문제를 다루기 위한 제3분과 위원회 등 설치가 결정됐다. 레베데프는 제2분과 위원회 소련 측 대표를 담당했다. 미국 측 대표는 웨커링 장군이었다.)

16시40분에 하지의 집에서 만찬이 있었다. 그의 만찬에 가기 전에 우리는 그곳에서 배고플 것이란 생각에서 집에서 식사를 했다. 우선 칵테일이 나왔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내내 주변 미군 장교들과 실없는 농담을 지껄여야 했다.

(다음은 제2차 미소공위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내용들에 대해 소련 측이 요구해야 될 기본적인 사항들을 정리한 것 인 듯하다. 이를 통해 미소공위 및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소련 측 구상을 보다 분명하게 확인활 수 있다.)

1, (미소공위)협의에 참가하고자 하는 모든 조선 내 민주적 정당과 사회단체는 공동성명 제5호에 아무런 조건이나 주석 없이 서명해야 된다.

2, 간부들이 아직도 모스크바 결정을 반대하고 있는 단체로부터는 서명을 받는 것이 합당치 않다.

3, 하지의 제안 2에 대해 소련 대표단은 의심을 야기시키는 대표자들과 협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들이 현재 다음의 3항에 관해 적대적 인지를 실제적으로 조사해 보아야 한다.

a, 모스크바 결정에 대해

b, 연합국 중 한 나라에 대해

c, 공동 위원회에 대해

과거에 모스크바 결정에 대해 적대행위를 했으나 지금은 그러한 활동을 멈춘 사람은 협의 참가가 허용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더 적대행위를 한다면 그들을 협의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4, 공동성명 제5호에 서명한 뒤 위원회 활동, 모스크바 결정, 연합국 중 한 나라에 대해 적극적 반대 행위를 선동하거나 지지한 인물은 신속히 제명시킬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상은 미소공위 협의대상 정당 사회단체 선정에 있어 소련 측이 요구해야 될 입장들이다. 소련 측은 이 같은 기준을 통해 특히 반탁운동을 계속하고자 했던 남한 내 우파세력들을 협의대상에서 제외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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