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정권 수립 裏面史 레베데프 비망록 1
인민위원 84%가 노동자·농민
통일에 대한 열망이 90년대 들어 부쩍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 통일작업의 기초 자료가 될 45년 해방직후 한반도 특히 북한에 대한 자료와 연구는 빈곤상태를 면치 못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지난해 본사 宋珖鎬 모스크바 특파원은 前북한 蘇聯군정 레베데프 사령관의 당시 비망록을 발굴, 해방직후 북한 내부 사정에 대한 많은 역사적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 받았다.본사는 한반도 통일에 대한 기초자료를 제공해 줄 레베데프 비망록에다 관련학자들의 해설을 곁들여 시리즈로 연재한다.레베데프비망록은 47년 5월14일부터 시작되고 있다.이때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 비망록 내용은 이 회의에 대한 舊소련군정청의 준비상황부터 적고 있다. 〈편집자註〉
5월14일
오늘 1947년 5월 12일자로 보낸 소련국무회의의 훈령을 받았다.
다음은 5월 12일자 훈령 1503?399의 미소공동위원회 소비에트(소련)대표단에 관한 것이다.
1, 미소공위 소비에트대표단은 다음과 같이 구성한다.
단장: 스티코프상장(중장)
위원: 툰킨
위원: 레베데프 소장
(스티코프: 1939~40년 핀란드와의 전쟁에 참여했다. 일본 패망 이후에는 연해주관구 군사회의 군사정치위원을 역임. 실제적으로 소련의 대북한 정책을 현지에서 좌우했던 최고의 핵심 인물이었다. 1946년 3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시 소련측 대표단장을 역임했고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시에도 대표단장을 역임했다. 북한정권이 들어선 1948년 9월 이후에는 초대 북한대사를 역임했다.)
2, 소비에트대표단의 구성원에 관한 예정 명단을 확실히 한다.
3, 소비에트대표단내 역원 개개 구성원을 위해 구성원의 직무와 그들이 예전에 가졌던 직무에 따라서 받을 수 있는 급료의 지급을 보장한다.
4, 위원회 정원
〈지도조직〉
대표단 위원: 3명
위원회 고문 :4명
전문가: 2명
위탁인: 1명
육군대학 연구생: 2명
계: 12명
〈비서직〉
책임비서: 대령 1명
책임비서 보좌: 중령 또는 소령 1명
사무담당: 대위 1명
고용숙달 속기사: 3명
고용기사: 3명
영어 통역관: 4명
한국어 통역관: 3명
계: 16명
〈특별 통신부서〉
부서 책임관: 소령 1명
암호 담당관: 대위 2명
선임 무선기사: 중사 1명
무선기사: 상등병 2명
계: 6명
〈경리부서〉
경리부서 책임관: 소령 1명
경리부서 지휘관: 중사 1명
고용 요리사: 2명
고용 급사: 1명
군속 취사장 인부 및 청소부: 2명
고참 운전수: 중사 2명
운전수: 사병 4명
계: 13명
〈재정부서〉
재정부 책임관: 대위 1명
〈보건부서〉
의사: 소령 1명
총계: 49명
참고: 대표단이 남한으로 여행하는 동안 제25군 지휘부는 장교를 책임자로 하는 8명의 전신전화 연락부와 15명으로 구성되는 경비부대를 선발한다.
5월15일
노인 측으로부터 발렌친이 전화했다. 5월 25일 서울에서 공동위원회 활동 개시와 관련하여 중도주의자들의 회합이 있을 예정이다. 좌파들은 어떻게 할까? 우리의 의견으로는 좌파들은 이 모임에 참가해서는 안되고 자신들만의 회합을 소집해야 한다. 여기에서 대중들이 누구를 따를지가 나타날 것이다.
(「노인」은 남한에서 정보 활동을 하는 책임자인 듯하며 「발렌친」은 남한으로부터 정보를 제공해주는 인물인 듯하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련측은 남한 중도파의 행동에 대해 예민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5월16일
아침 우리 대표인 마슬로프 투르킨 그리고 한 명의 통역관이 서울로 떠났다. 낮에는 서울로 출발하기 위해 준비된 기차를 돌아보았다. 마치 황제용 기차처럼 장식돼 있었다. 임무수행을 위해서는 그런 외견상 장식은 필요치 않다.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다.
이그나치예프는(다음과 같은) 북한에 관한 완전한 정보를 준비했다.
(다음은 이그나치예프카 준비한 정보의 내용. 1946년 말과 1947년 초에 북한에서 실시된 각급 인민위원회 선거에 대한 각종 통계와 당시 각 정당의 당원수 그리고 교육시설에 대한 통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당시 북한에서 선거는 흑백함 선거였다.)
▲1946년 11월에 도·시·군인민위원회 선거가 행해졌다. 선거인 등록자 총수의 99.6%에 해당하는 4백50만1천8백13명이 투표에 참여했다.투표 참가자의 97%가 북조선 민전 후보자들(북한의 각정당·사회단체 전선체인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당시 공동 후보를 내세우고 있었다)에게 찬성표를 던졌다.
▲1947년 3월에는 면·이(里) 인민위원회 선거가 행해졌다. 면 선거에서는 선거인 총수의 99.9%에 달하는 3백76만6천6백25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투표 참여자의 96.2%가 북조선민전 후보에게 찬성표를 던졌다. 이 인민위원회 선거에서는 선거인인 총수의 99.82%에 해당하는 3백85만9천3백19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이를 통해 5만3천3백14명의 위원이 선출됐다. 면·이 인민위원회 선거에 4천6백73명의 선거권이 박탈됐다. 그들 중 4백20명은 친일파였고 4천2백46명은 정신이상자였으며 7명은 재판에 계류중이었다.
▲전체인민위원회(도·시·군·면·이)에서 총 7만4백54명의 위원들이 선출됐다.
?이들의 사회성분은 다음과 같다.
농민 78& 노동자 6.4% 사무원 12.6% 지식인층 1.03% 상인 1.22% 기업가 0.37%(2백55명) 종교인 0.33%(2백11명) 前지주 0.04%(32명) 수공업자 5%.
?정당소속
노동당 57.7% 민주당 7.7% 천도교 5.3% 무소속 29.3%.
?인민위원으로 선출된 사람 중 9천5백21명이 여성으로 인민위원 총수의 12.1%를 차지한다.
▲2월17일 인민위원회대회 제1차 회의가 개막됐다. 도·시·군 인민위원회 총회에서 평균 3명의 인민위원중 1명이 인민위원회대회 대표로 선출됐다. 1천1백59명의 대표들이 대회에 참석했다. 그 중 25명(35명의 오기임. 당시 정당과 사회단체에서는 각 5명씩의 대표를 인민위원회 대회에 참여시켰다)은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이었다.
?인민위원회대회 대표 사회성분
노동자 2백29명 농민 3백13명 사무원 3백30명 인텔리 1백10명 상인 11명 수공업자 6명 기업가 8명 종교인 34명 가정주부 및 여성 가사노동자 13명.
?정당소속
노동당 5백79명 민주당 1백37명 천도교 1백32명 무소속 3백21명.
?대표 중 1백58명은 여성이었다.
▲대회는 임시인민위원회에서 발표했던 모든 법령들을 승인하는 한편 비밀투표로 2백37명으로 구성되는 인민회의를 선출했다.
?인민회의 대표 사회성분
노동자 53명 농민 60명 사무원 59명 인텔리 34명 상인 4명 수공업자 5명 기업가 5명 종교인 10명.
?정당소속
노동당 89명 민주당 29명 천도교 29명 무소속 90명.
▲1947년 4월1일 현재 정당의 당원 수
?노동당 당원 수 63만명. 그들 중 노동자 30.3% 농민 61.9% 사무원 13% 나머지는 기업가 수공업자 상인 자유직업인 등 기타 인물들이 차지. 당은 6개 도위원회, 89개 군위원회, 8백7개 면위원회 등을 지님.
?민주당. 1945년 11월 초에 조직됐다. 1947년 4월15일 현재 당원 수 24만5천명. 당은 주로 중소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음. 사회성분은 숙련노동자 8.2% 부농 68.6% 상인 9% 사무원과 지식인 9.7% 기업가 0.52% 수공업자 1.2% 기타 2.77%.
?천도교. 1946년 2월에 정당으로 조직됐음. 주로 농민으로 구성. 1947년 5월1일자 당원 수는 23만명. 사회성분은 노동자 17% 농민 77% 사무원 2.3% 상인 0.9% 기업가 및 수공업자 1.9%.
5월17일
?흥미로운 문화자료
◇초등학교
△학교수 일제시대 1천3백72, 1947년 현재 2천4백82 △학생수 일제시대 87만8천, 1947년 현재 1백18만3천.
◇중등학교
△학교수 일제시대 44, 1947년 현재 2백17 △학생수 1만7천, 1947년 현재 7만.
◇기술전문학교
△학교수 일제시대 62, 1947년 현재 68 △학생수 일제시대 1만5천, 1947년 현재 2만.
◇기술양성소
1947년 현재 27, 참여자수 1만.
1946년에는 1개의 의과대학, 2개의 교원대학 그리고 현재 3천3백37명이 공부하고 있는 1개의 종합대학이 문을 열었다.
1947년 9월1일부터 공업대학 교원대학이 문을 열 계획이며 그 학생수는 6천3백명에 달할 예정임.